행동주의의 공습, 전략의 실패인가 가치의 괴리인가?
최근 한국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는 빠르게 일상화되고 있다. 상법 개정과 밸류업 정책은 주주 권한과 이사회 책임을 강화하며 기업 경영에 대한 시장 감시를 한층 높이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이 국내 상장사를 대상으로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사업 구조 개편을 요구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 기업에서는 이사회 개편과 경영진 교체 요구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투자자 기대 수준의 구조적 변화가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인베스터 퍼스펙티브 시리즈(Investor Perspectives Series)'는 투자자들이 단기 실적 달성과 동시에 성장 투자와 적극적인 자본 배분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행동주의는 특정 투자자의 전략이라기보다, 높아진 시장 기대가 반영된 결과에 가깝다.
그럼에도 많은 경영진은 이를 외부 압박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행동주의의 본질은 전략이 아니라 가치의 괴리에 있다. 작년 12월 BCG 밸류사이언스센터(ValueScience® Center)가 분석한 글로벌 행동주의 캠페인에 따르면, 전체 캠페인의 약 48%는 총주주수익률(TSR·Total Shareholder Return)과 밸류에이션이 동시에 낮은 이른바 '저평가 구간'에 집중된다.
이 괴리가 방치될 경우 리스크는 현실이 된다. 최고경영자(CEO) 교체 가능성이 약 24% 높아지고, 상당수 기업이 행동주의 개입 이후 1년 내 상대적 TSR 하락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조용한 가치 침식(Value Erosion), 리더가 빠지기 쉬운 함정
문제는 가치 훼손이 위기처럼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업 가치는 급격히 붕괴하기보다 경영진의 반복적인 의사결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약화된다.
대표적으로 보수적인 가이던스는 단기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성장 기대를 낮추는 신호로 작용한다. BCG가 최근 발표한 'The CEO's Value Test: Think Like an Activist, Deliver Like a Leader'는 투자자 기대가 이미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절반 이상의 투자자가 실적 달성과 성장 투자를 동시에 요구하고 있으며, 36%는 단기 실적보다 성장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반면 단기 성과만을 중시하는 비율은 10%대에 그친다.
기업이 가치 창출 스토리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할 경우 시장은 이를 대신 해석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전략, 재무, 투자자 커뮤니케이션이 분리된 구조 역시 이러한 괴리를 확대시키는 요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필요한 것은 방어가 아니라 관점의 전환이다. BCG는 CEO가 행동주의 투자자처럼 사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핵심은 기업 가치를 구성하는 요소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매출 성장, 수익성, 밸류에이션, 자본 배분이 기업 가치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경영진 전체가 하나의 가치 창출 아젠다 아래 정렬될 필요가 있다.
투자자에 대한 이해 역시 중요하다. 투자자는 단기 수익과 장기 성장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평가하며, 이에 따라 기업의 전략 메시지 역시 달라질 수 있다. 성과 관리 체계 또한 KPI와 인센티브가 기업 가치와 직접 연결되는 방향으로 재설계될 필요가 있다.
◇ 선제적 가치 증명과 K-디스카운트, 그리고 CEO의 선택
행동주의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별도의 방어 전략을 구축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행동주의 투자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경영진이 먼저 기업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BCG 분석에 따르면 행동주의 캠페인의 성패는 초기 90일 내 방향이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이 명확한 전략과 실행력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시장 반응이 크게 갈린다. 결국 행동주의 국면에서는 속도와 명확성이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기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재 많은 기업이 전략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장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설명하는 데는 여전히 한계를 보인다. 투자자 커뮤니케이션은 제한적이고, 성과 관리 체계 역시 내부 효율 중심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내재 가치와 시장 평가 간 괴리가 발생하고, 이는 장기적으로 밸류에이션 디스카운트로 이어진다. 'K-디스카운트'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행동주의는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이벤트가 아니다. 시장 구조가 변화하면서 기업이 지속적으로 마주해야 할 경영 환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경영진에게 남은 선택지는 분명하다. 시장의 요구에 끌려갈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앞서 가치를 스스로 정의하고 증명할 것인가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