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정치권이 추진 중인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 방안을 두고 서울 서초구에서 피부과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59) 원장은 "많은 의사들은 청구 간소화에 대해 '재주는 의사가 부리고, 혜택은 보험사가 갖는 구조'라 여긴다"며 "실손 청구 간소화에 대한 반발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일러스트=이은현

최근 정치권이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에 대한 새 중재안을 내놓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소비자들의 편익을 위해 지난 2009년부터 도입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의사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13년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해묵은 과제로 남은 상황이다.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진료 기록이 자동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전산으로 넘어가 환자들이 따로 진료 내역을 기록해 제출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껏 환자들은 진료를 받은 후 일일이 이를 별도의 종이 서류에 손으로 작성해 우편 등으로 보험사에 보내거나 금융 앱, 이메일 등을 통해 제출해야 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번거로운 제출 작업을 해야 했고, 지금과 같은 청구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의사들은 진료기록이 쌓이고 빅데이터가 분석될 경우 주요 수익원이었던 비급여 항목에서의 진료비 측정 권한이 넘어갈 것을 우려해 지금껏 청구 간소화에 반대해 왔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정부가 다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추진하려는 뜻을 보이자,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7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별도의 태스크포스(TF)까지 구성하기도 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아이디어를 제시해 현재 논의 중인 새 중재안은 심평원이 비급여 항목에 대한 진료 기록을 수집해 분석하거나 유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안전장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심평원이 진료 기록을 모아 빅데이터를 구성하고 이를 분석해 비급여 항목에 측정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는 의사들의 반발을 고려한 것이다.

윤 의원은 "쉽게 말해 병원에서 심평원으로 가는 '데이터 고속도로'만 깔아 놓고 어떤 차가 지나갔는지 등에 대한 정보 수집이나 분석은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게 중재안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또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의사들이 경계하는 심평원이 아닌 핀테크 업체나 보험개발원 등 제3의 기관을 통해 청구 전산화 망을 도입하는 방안도 이번 중재안에 포함될 수 있다. 국회 관계자는 "현재 논의된 내용을 포함해 의사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는 추가 방식을 계속 검토 중"이라며 "현재는 여러 의견을 수렴하는 단계"라고 전했다.

정치권이 청구 간소화에 나선 이유는 낡은 기존 방식으로 환자들이 제때 받아야 할 보험금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윤창현 의원실에 따르면 2020년부터 올해까지 실손보험 지급 가능액은 37조5700억원 정도다. 같은 기간 실제 지급된 보험금 액수는 36조5700억원에 그쳤다. 윤 의원실은 청구 간소화가 도입됐다면 3년간 7400억원 정도가 추가 지급됐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이번 중재안에 대해서도 일선 의사들은 반발하는 기류가 강했다. 청구 간소화가 도입되게 되면 업무 강도도 높아질 뿐 아니라 이에 필요한 부가적인 비용도 발생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서울 구로구에서 30년 동안 내과를 운영해온 이모(63) 원장은 이번 중재안 내용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심평원이 아닌 다른 기관을 통해 진료 기록을 전달한다 하더라도 의사들의 업무량은 대폭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국내 의사들은 다른 나라의 의사들보다 보통 5배 정도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며 "의료비 또한 방글라데시와 같이 전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 중"이라고 주장했다. 또 "진료 관련 업무도 많은데 청구 간소화를 위한 시스템 도입으로 병원 운영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인력을 채용해도 결국은 전부 돈인데, 이에 대한 지원책은 미비하다"고 덧붙였다.

서초구 피부과의 김 원장 역시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는 개인 병원의 경우 보통 1명의 원장과 3명 정도의 간호사가 일하고 있는데, 청구 간소화가 도입된다 하면 업무 부담이 더욱 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병원마다 편차는 있지만, 하루 50명에서 100명의 환자를 보고 있다"며 "서류 관련 업무까지 도맡게 되면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비급여 제도를 건들지 않겠다는 정치권의 약속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정치권은 표를 위해 비급여 제도에 대한 규제 강화를 약속해 왔는데, 이번 중재안 역시 이 같은 약속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정치권은 늘 의사들의 수익을 줄이는 쪽으로만 움직여 왔다"며 "이번 중재안이 의사들의 현재 수입을 보장할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의사협회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중재안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법안이 구체화되지 않아 섣불리 의견을 낼 수 없다는 설명이다. 협회 관계자는 "만일 구체적인 법안 내용이 나오면 회원 등과 논의해 대응에 나설 것"이라며 "아직은 아이디어 차원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내놓을 의견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