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산업계가 한국판 ‘배터리 여권제’(통합이력관리시스템·가칭) 도입을 추진하는 가운데, 완성차 업계와 셀 제조업계가 배터리 관련 정보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배터리 여권에 입력하는 데이터 범위나 내용이 기업의 핵심 기술이나 영업 비밀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민관합동 배터리얼라이언스는 배터리 여권이 수집하는 데이터 기준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 완성차, 배터리 관련 기업·기관들로 구성된 배터리얼라이언스는 지난해 11월 정부에 배터리 여권 도입 등의 내용을 담은 건의안을 제출했다. 사용 후 배터리 시장을 활성화한다는 취지였다.

전기차(EV) 정비사가 배터리 등급 평가를 위해 중고 EV에 탑재된 고전압 배터리를 점검하고 있다./현대차·기아 제공

완성차와 셀 제조업계는 ‘완성차의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정보’, ‘전기차 소유주의 개인정보영역을 침해할 수 있는 수준의 정보’ 등을 두고 논의를 진행 중이다.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성능, 수명을 최적의 상태로 관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배터리 제어(시스템) 정보가 대표적이다.

셀 업체들은 배터리 성능 개발을 위해 배터리가 전기차에 탑재된 이후 주행, 충전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완성차 업체는 영업 비밀, 기술, 개인정보 보안 등을 이유로 데이터 제공을 꺼리고 있다. 정보를 넘겨주면 배터리 가격 협상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배터리 여권은 유럽연합(EU)에서 먼저 추진됐다. 배터리 생산, 사용, 폐기, 재사용, 재활용 등 전 주기에 걸친 정보를 하나의 통합 시스템에 입력해 배터리 공급망과 안정성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핵심원자재법(CRMA)과 별개로 논의돼 2026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

전기차 생태계의 확장 가능성을 고려하면 완성차와 셀 업체가 종국에는 합의점을 찾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배터리 여권을 포함해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도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딜로이트에 따르면 전기차 판매량은 지난 2020년 250만대에서, 2025년 1120만대, 2030년에는 3110만대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SNE리서치는 전기차 시장이 성장하면서 사용 후 배터리 재활용 시장은 2030년 60조원 규모에 이를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