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의 중형 조선사들의 수주액이 전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중형 조선사들이 선수금 환급 보증(RG) 발급 한도에 도달해, 건조 여력이 있어도 새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RG는 조선사가 선박을 제때 건조하지 못하거나 파산할 경우, 은행이 선주에게 선수금을 대신 물어주는 지급보증이다. 통상 RG 발급이 선행돼야 선주는 조선사에 대금을 지급하고, 조선사는 이 돈으로 배를 짓는다. RG 발급이 이뤄지지 않으면 계약이 불가능하다.
2일 조선업계 따르면, 한국조선해양,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010140) 등 대형 조선사를 제외한 중형 조선사의 지난해 총 수주액은 21억7000만달러로 2021년 대비 53.0% 감소했다. 이에 따라 중형 조선사의 수주액이 국내 조선업계의 신조선 수주액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21년 6.8%에서 2022년 3.1%로 줄었다.
이는 중형 조선사들의 주력 선종인 탱커(액체 화물선)와 컨테이너선 수요가 악화된 영향도 있지만, 일부 조선사들이 수주한 중대형 컨테이너선이 RG발급 한도에 부딪혀 계약이 취소된 충격도 있었다.
RG 발급은 기업별 자본금 규모와 신용등급 등에 따라 결정되는 여신 한도 내에서 이뤄진다. 지난해 구조조정을 마치고 기초 체력을 기르는 중소 조선사의 여신 한도는 전성기에 비해 약화된 상황이다. 조선사들이 RG 한도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다. RG 한도가 줄면 수주가 줄고, 이는 매출 및 이익 정체로 이어져 신용등급 상승을 제약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는 중소 조선업계의 RG 한도 문제를 인식하고 대책을 마련 중이다. 정부가 지난달 23일 발표한 '2023년 수출 여건 및 범정부 수출확대 전략'에 따르면, 무역보험공사가 특례보증제를 통해 RG 한도 소진 업체의 수주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실질적 효과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조선업계는 업황이 좋지 않던 시기의 낮은 신조선가와 약달러를 기준으로 설정된 RG 발급 기준이 지난해부터 시작된 높은 신조선가와 강달러라는 시장 환경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최근 2년간 신조선가가 급상승하면서, 과거보다 적은 물량을 수주했는데도 조선사의 RG 발급 한도가 소진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인력 등 수주 여력이 남아 있는데도 수주가 제한되는 일이 생긴다.
작년 하반기 기준 중소 조선사의 주력 선종인 MR급, 아프라막스급 탱커의 선가는 각각 4300만달러, 6100만 달러다. 2년 전인 2020년 기준 선가는 MR급이 3400만달러, 아프라막스급은 4650만달러였다. 신조선가만 26~31% 상승한 것이다. 여기에 2020년 대비 달러 가치도 10% 이상 상승했다. 같은 규모의 수주를 위해서도 RG 한도가 30% 이상 더 필요한 이유다.
양종서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탱커시장의 운임이 매우 양호한 수준이며, 선사들의 재무적 상황도 개선되고 있어 국내 중형조선산업의 주력 선종인 탱커의 수요가 점차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인력난과 RG발급 한도 문제 등에 대한 정책적 지원으로 국내 중형 조선산업의 기반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