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가 가상자산을 거래소에 예치할 경우 이를 신탁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신탁으로 인정되면 거래소 파산 시 가상자산에 대한 권리가 이용자들에게 우선 부여될 수 있어 투자자 보호가 용이해진다. 현재는 가상자산을 거래소에 위탁·보관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거래소 파산 시 분쟁 소지가 많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28일 가상자산 업계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법무부는 최근 ‘가상자산의 신탁 허용방안 및 법적 문제에 관한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용역을 받은 서울대 산학협력단은 지난 17일부터 연구에 착수했다.
법무부는 “최근 학계·실무계에서 가상자산 거래소의 파산 시 사용자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가상자산 신탁 방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며 “이번 연구용역은 학계·실무계 논의사항을 바탕으로 한 학술연구 목적”이라고 했다.
법무부는 이번 연구를 통해 가상자산을 재산으로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비롯해 거래소에 가상자산을 맡길 경우 이를 법률상 신탁으로 볼 수 있는지 등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가상자산이 신탁재산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가상자산이 법률상 재산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내년 7월 시행 예정인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은 이용자가 예치한 현금만 거래소 고유자산과 분리하도록 하고 있다.
국내에서 가상자산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상 신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거래소 이용자들이 가상자산을 거래소에 예치하는 스테이킹 등을 이용할 경우 위탁 관리·보관에 해당돼 가상자산에 대한 채권·채무 관계만 인정되는 수준이다.
만일 거래소가 파산해 청산 절차를 밟으면, 가상자산에 대한 권리는 거래소 채권자나 주주들에게 먼저 돌아갈 여지가 있어 투자자 보호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반면 신탁이 허용되면 이용자는 가상자산과 관련해 우선 변제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인 별제권 등을 얻을 가능성이 열린다.
이미 해외에서는 가상자산에 대한 신탁을 인정하는 추세다. 앞서 뉴질랜드 고등법원은 2020년 4월 자국 가상자산 거래소 크립토피아 리미티드(Cryptopia Limited)의 청산 과정에서 거래소가 보유한 가상자산에 대한 신탁을 인정한 바 있다. 뉴질랜드 법원은 암호화폐가 거래소의 데이터베이스에 명확하게 기록돼 있고 신탁의 수혜자가 계정 소유자로 명확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같은 판결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크립토피아는 2019년 1월 서버를 해킹당해 약 3000만뉴질랜드달러(한화 약 236억8770만원)의 암호화폐를 도난당해 청산 절차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암호화폐에 대한 신탁 여부가 문제로 불거졌다. 암호화폐를 거래소 운영업체 등이 보유하는 것인지, 이용자가 보유하는 것인지에 따라 변제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세계 최대 암호화폐 투자신탁회사 그레이스케일(Grayscale)이 암호화폐 신탁 상품을 이미 출시하고 있다. 비트코인 신탁 상품은 2020년 1월 최초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등록됐다.
법무부 관계자는 “디파이(DeFi) 등 여러 가상자산 거래 유형 중에서 신탁 형태를 통해 이용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법리 검토”라며 “현재 단계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