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에서 21년을 일했는데, 지금이 제일 힘들다. 주변에 많았던 사설 환전소 중 3분의 2 정도가 사라졌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고 예전과 같은 전성기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요즘은 가게를 접어야 하나, 고민이 많다.”

지난 2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의 한 사설 환전소에서 만난 업주 김모(73)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김씨는 지난 1998년 국내에서 사설 환전소 신고제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게를 낸 명동 환전 시장의 ‘터줏대감’ 중 한 명이다.

2일 서울 명동에 위치한 환전소. /김수정 기자

김씨에 따르면 명동에는 3년 전만 해도 그의 가게처럼 20년을 넘긴 사설 환전소가 열 곳 이상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지금은 20년 이상 된 사설 환전소는 대부분 사라졌다.

◇ 1970년대부터 명동 주름잡던 환전상… 1998년 사설 환전소 신고제 도입 후 양지로

명동 일대 환전상들의 역사는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고 세계 여러 나라와의 교역량이 크게 늘면서 은행보다 수수료가 저렴한 암달러상들에게 달러를 사려는 사람들이 명동 일대를 찾았다고 한다.

이날 남대문시장 앞 삼거리에서 만난 환전상 한모(86)씨는 “50년 동안 이곳을 지키며 달러를 사고팔아 아들딸을 다 키워 시집, 장가를 보냈다”고 했다. 그는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나 보따리상이 제일 비중이 큰 고객이었다”며 “70년대부터 한국을 찾는 관광객과 유학생도 늘면서 호황을 누렸다”고 회상했다.

암달러상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손님으로부터 은행보다 달러를 비싸게 사 은행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에게 달러를 팔았다. 워낙 명동과 남대문 등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은행보다 싸게 달러를 팔아도 수익이 많았다. 90년대까지 명동 인근에는 암달러상들이 골목마다 40~50명씩 줄지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한 환전상이 달러를 환전해주고 있다. /조선DB

1998년 사설 환전소 신고제가 도입되면서 암달러상들은 양지로 나왔다. 정부는 날로 규모가 커지는 사설 환전소 산업을 양성화하기 위해 신고제를 실시했다. 명동과 남대문 등에서 좌판을 펴고 장사를 했던 암달러상들은 이때부터 사무실을 임대해 정식으로 ‘외환거래 사업자’로 인정을 받게 됐다.

◇ 한류 붐과 함께 맞이한 2000년대 황금기… 사드 배치 이후 호황 끝나

명동 일대 환전상들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류 열풍이 일면서 명동 일대로 관광객이 몰려 환전상들이 호황을 누린 것이다.

환전상 김씨는 “2000년대 들어 드라마 ‘겨울연가’나 ‘가을동화’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특히 일본인 관광객이 많아졌다”며 “또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 K팝이 인기를 끌며 중국인 관광객들도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그 시기부터 명동에는 대형 건물과 시내면세점 등 랜드마크가 들어섰다. 특히 중국인들의 한국 화장품 수요가 늘면서 로드샵들이 명동 거리를 점령해 나갔다. 길거리 쇼핑을 즐기고 명동과 남대문 일대 식당과 가게를 찾는 관광객들이 늘면서, 근처에 있는 환전소를 찾아 즉석에서 돈을 바꾸려는 사람들도 크게 증가했다.

환전 수수료는 환전금액의 1% 채 안 되지만, 당시 워낙 거래량이 많다 보니 명동 사설 환전상들은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김씨의 환전소에는 하루 거래액이 10억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김씨는 “가게에 손님이 너무 붐벼 공간을 늘리기 위해 안내데스크를 뒤쪽으로 옮길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명동 일대 환전상들의 호황은 거짓말처럼 끝났다. 지난 2017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로 가장 비중이 큰 고객이었던 중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설상가상으로 2019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까지 덮치면서 명동을 찾는 사람들은 자취를 감췄고, 자연스럽게 이곳에 자리 잡았던 사설 환전소들도 하나 둘 사라져갔다.

그래픽=이은현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 수는 416만9353명으로 전년 대비 48.3% 감소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96만명으로 코로나 이전인 2019년(1750만명)에 비해 94.5% 감소했다. 김씨는 “사드 이후 매출의 절반이 줄었다면 코로나19 이후로는 90%가 줄었다”며 “최근에는 하루 거래액이 1000만원도 안 될 때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환전상들은 수입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전국 최고 수준을 기록 중인 명동 일대 임대료로 인해 살 길이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지난해 점포당 평균 전용면적(64.5㎡)으로 환산한 명동의 월평균 임대료는 1372만원으로 전국 1위를 기록했다.

◇ 젊은 세대는 중고거래 앱에서 달러 거래… 사설 환전소, 역사의 뒤안길로

코로나 사태에 따른 출입국 규제가 모두 풀리고 완전한 일상생활이 회복되면 명동 일대 환전상들은 다시 예전의 화려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날 만난 환전상들은 이에 대해 대부분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시대가 변화해 사람들은 다양한 새 경로에서 외화를 바꾸지, 길거리 환전소를 찾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그동안 사설 환전소들이 주로 했던 소액 환전에 대한 수요는 최근 중고거래사이트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한 직거래로 옮겨갔다. 대표적인 중고물품거래 앱인 당근마켓에는 하루에도 수십개씩 달러화를 사고, 판다는 글을 올라오고 있다.

미뤄둔 여름휴가를 써 다음 달 미국으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는 직장인 조모(42)씨는 “당근마켓 등에서 언제든 간편하게 달러 직거래를 할 수 있는데, 굳이 발품을 팔아가며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사설 환전소를 찾아갈 이유가 있느냐”고 말했다. 그는 “최근 환율이 너무 올라 파격적인 싼 가격에 달러를 살 수 있다면 환전소 이용을 고민해 보겠지만, 크게 이점이 없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