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서서 살려야 하나? 뒤로 빠져야 하나?’

삼성중공업(010140)이 유동성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7일 오후 자구안을 제출했다. 1999년 삼성자동차 사태 이후 17년 만에 삼성 계열사가 처음으로 채권단에 자구계획(구조조정안)을 제출하면서 손을 벌렸다.

재계에서는 “삼성중공업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이 뒤에서 버티고 있지만, 뾰족한 묘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냥 둘 수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분석했다.

삼성의 오너인 이재용(48) 부회장은 상장폐지·자본잠식 위기에 몰렸던 삼성엔지니어링처럼 이번에도 삼성중공업 살리기에 나설까? 삼성중공업의 최대주주인 삼성전자(삼성중공업의 지분 17.62% 보유)는 어떤 역할을 할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2015년 2분기 대규모 적자…해양플랜트 부실·유동성 위기 올 수도

삼성중공업의 위기는 작년 2분기 1조5491억원의 적자를 내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이 부회장은 작년 11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를 직접 방문, 박대영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으로부터 조선업계 상황과 수주·건조 동향 등에 대해 보고받았다. 표면적으로는 현장경영의 일환으로 계열사 사업장을 찾은 것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위기의 강도가 얼마나 클지 가늠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분석했다.

삼성중공업은 2014년 초 강도 높은 그룹 경영진단을 받았지만, 해양플랜트 부실 등의 영향으로 실적 회복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올해 1분기 61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같은 해 4월 셸(Shell)사로부터 수주한 47억달러(5조3000억원) 규모의 부유식 LNG생산설비(FLNG) 3척에 대한 계약이 해지됐다. 올해 4월까지 단 한 건의 수주도 따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이 사업 포트폴리오가 다변화돼 있지 않은 데다 수주 잔고가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에 비해 적어 예상보다 위태롭다는 진단을 받았다. 해양플랜트에서 추가 부실이 발생할 경우 조선 빅3 중 상대적으로 양호한 재무상태도 한 순간에 나빠질 수 있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조선 외에 정유, 건설 등의 사업이 있지만, 삼성중공업은 최악의 상황에 놓인 조선만 바라보고 있다는 지적이다. 수주 잔고도 16조5000억원(매출 기준)으로 1년 6개월 치 일감만 남아있다.

전재천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중공업이 지금까지 운영을 잘 해왔지만, 정상적인 만기채 도래에 대해 연장을 안 해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회사로 버틸 수 있는 현대중공업보다 유동성 위기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 삼성 황태자, 엔지니어링처럼 중공업 살리기 나설까?

삼성그룹은 2014년 9월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계획을 전격 발표하면서 사업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합병 계획 발표 후 두 회사의 주가가 떨어지면서, 주주들의 주식매수청구권(자신의 주식을 되사달라고 요청)이 몰렸다. 삼성그룹은 합병 작업 무산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고,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권 강화 시도도 실패한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삼성은 삼성중공업 구제방안을 놓고 다각도로 검토했지만, 아직 그룹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용은 없다. 박무현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조선은 자금만 투입한다고 잘 되는 산업은 아니다. 세계 시장과 맞물려 간다. 지금 삼성중공업의 문제는 배를 만들어 인도했다는(선박을 발주고객에게 넘기는) 뉴스가 거의 안 나온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허욱 기자

시선은 이재용 부회장의 결단에 쏠리고 있다. 작년 말 상장폐지·자본잠식 위기에 몰렸던 삼성엔지니어링의 경우, 유상증자 과정에서 기존 주주의 미청약분이 발생하면 이 부회장이 일반 공모에 참여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유상증자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이 부회장은 공모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올해 2월 삼성엔지니어링이 보유한 자사주 302만 주(300억원 규모)를 인수했고, 추가로 700억원 규모의 주식도 취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삼성중공업의 문제는 이재용 부회장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다른 조선사들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이동걸 회장은 삼성그룹의 삼성중공업 경영권 포기 가능성에 대해 “그런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

초우량 전자기업 삼성전자가 유동성 위기에 허덕이는 삼성중공업을 돕는 것에 대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부담스러운 요인이다. 올해 1분기 스마트폰·반도체 사업의 선전으로 6조68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삼성전자의 주가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중공업의 유상증자에 참여하거나 삼성 계열사가 가진 삼성중공업의 주식을 취득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삼성생명(3.38%), 삼성전기(2.39%) 같은 삼성중공업의 주주사들이 구원투수로 등판할 가능성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중공업이 채권단의 수혈을 받는다면 오너의 사재출연이나 주식취득 같은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국내 그룹 중 가장 재무상태가 양호하다고 평가받는 삼성 계열사가 그룹의 지원 없이 국책은행의 도움으로 살아난다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며 핵심 계열사 위주로 사업을 재편하고 있는 ‘이재용의 뉴 삼성’이 위기에 빠진 삼성중공업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재계의 시선이 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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