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파업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거대 노조의 세력화에 대한 책임론이 삼성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반도체 호황기와 불황기를 거치며 누적된 성과급·복지·근무환경 불만을 삼성의 컨트롤타워인 사업지원실과 인사 조직이 제때 관리하지 못했고, 수년간 쌓인 임직원들의 불만이 노조라는 형태로 응집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DX(완제품), DS(반도체)부문 등 일부 임원들은 이번 삼성전자 초기업노조의 파업 위기가 수년간 지속된 삼성 경영진의 인사 정책, 재무, 경직된 소통 시스템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노조의 무리한 요구만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상황을 이 정도로 방치한 사업지원실의 책임을 점검하고, 재정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다.
삼성전자 DS부문 메모리 사업부의 한 고위 임원은 "삼성 반도체에 이 같은 강성 노조가 출범하게 된 것은 단순히 성과급에 대한 불만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관리의 실패'로 봐야 한다"며 "노조가 영향력을 키워온 과정에서 경영진, 특히 인사·재무 라인이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임직원과의 소통에 귀를 닫고 있었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했다.
◇ "비용 통제에만 혈안, 임직원 불만엔 귀 닫아"
지난 2024년 6월 기준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조합원 수는 2만8397명으로, 전체 임직원 약 12만명의 23.6% 수준이었다. 그로부터 약 20개월 뒤인 올해 2월, 삼성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조합원 수는 7만5000명을 넘어 전체 임직원의 62.5%에 달하는 과반 노조 지위를 확보했다. 한국 대기업 노조 역사상 이처럼 빠른 속도의 조직화는 유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의 한 연구원은 "다수의 직원들이 노조에 가입한 가장 큰 이유는 회사의 경직된 시스템에 대한 불만과 이를 수년간 사내 게시판, 소셜미디어(SNS) 등에 표출했음에도 회사가 반영하지 않은 것"이라며 "재무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영 시스템은 비용 통제에만 민첩할 뿐 직원들의 불만을 무시해 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왔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DS부문 직원들에게 OPI(초과이익성과급)는 단순한 성과 보너스가 아니다. 소속 사업부 실적이 목표를 초과하면 그 이익의 20% 한도 내에서 개인 연봉의 최대 50%까지 지급되는 제도는 삼성이 성과를 구성원과 나누는 방식의 상징이었다. DS부문 직원들은 2021년과 2022년 연속으로 OPI 최대치인 연봉의 50%를 수령했다. '삼성의 보상 체계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암묵적 신뢰가 존재했던 시기였고, 이 신뢰는 전통적으로 삼성에 노조가 필요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 대규모 적자 국면서 노조원 폭발적 증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2023년이었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급격한 침체기를 맞으며 DS부문은 연간 14조8800억원의 적자를 냈다. 그 결과 이듬해 초 지급되는 2023년도분 OPI는 0%로 결정됐다. 연봉의 절반에 달하던 성과급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이 시기 삼성전자는 임원 퇴직금을 유지하면서 등기이사 보수 한도를 17% 인상했다. 이에 '적자 책임을 경영진이 아니라 직원들에게만 전가하고 있다'는 불만이 사내에 확산됐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노조 가입자 수가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업황이 회복된 2024년에도 불신은 가라앉지 않았다. DS부문이 흑자 전환에 성공했음에도 2024년도분 OPI 지급률은 14%에 머물렀다. 2022년도분(50%)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당초 회사 측이 0~3%를 예고했다가 실제로는 14%로 결정됐지만, 구성원들이 체감하는 상대적 박탈감은 여전했다. 삼성전자의 한 직원은 "성과급 체계가 불공평하고 주먹구구식이라는 불만이 확산된 건 이 시기다. 파운드리 대규모 적자에 책임이 있는 임원이나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부진에 책임이 있는 임원이 두둑한 보너스를 챙기는 것에 대해 회사의 성과 보상 시스템 자체가 잘못됐다는 인식이 퍼졌다"고 설명했다.
회사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퍼지게 되는 경로도 경영진이 과소평가한 변수였다. 해당 시기에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등과 같은 SNS가 부서·직급을 가로지르는 수평 연대의 공간이 됐다. 과거라면 개인 불만에 그쳤을 문제들이 SNS를 통해 공론화된 것이다. 성과급 산식, 출장비 삭감, 복지 축소, 사업부 간 보상 격차와 같은 구체적인 주제에 대한 토론이 논란과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후 SK하이닉스가 대규모 성과급을 임직원에 풀면서 삼성전자 임직원의 박탈감이 폭발하는 마지막 퍼즐을 채웠다.
◇ "경영진과 임직원 신뢰 붕괴가 가장 큰 문제"
재계에선 이번 파업이 단순히 일시적으로 봉합할 문제가 아니라 경영진과 직원 간의 신뢰가 완전히 붕괴된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파업 돌입 여부와 무관하게 삼성전자가 중장기적으로 떠안게 된 노사간 구조적 갈등 문제의 불씨가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는 삼성전자 최고 의사결정 조직인 사업지원실이 과거와 달리 전향적인 태도로 '소통 경영'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경영진이 노조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다기보다 지속 가능한 보상·소통 체계를 새로 설계하지 못했고, 재무 중심 의사결정 구조가 현장 불만을 흡수하는 데 한계를 노출했다"며 "인사·재무·성과지표에 대한 선제적 점검과 소통이 있었다면 애초에 노조 리스크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비판이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가 성공적인 경영자로 평가 받는 이유는 적극적인 소통과 서로 협력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라며 "이병철 창업주와 이건희 선대회장 시절 삼성에 존재했던 사람을 키우는 문화, 경청하는 문화가 사라진 것이 노사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