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주문형 반도체(ASIC)가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브로드컴이 시장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여기에 일본의 전통적인 ASIC 기업들과 신흥 강자들이 사업을 확장 중이다. 중국도 주요 빅테크 기업들을 중심으로 ASIC 관련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내년부터 ASIC 시장이 그래픽처리장치(GPU) 못지 않은 격전지가 될 것으로 관측한다. ASIC은 학습, 추론 등 철저하게 ‘특정 기능’에 특화한 맞춤형으로 설계, 생산되는 칩으로 GPU 대비 가격, 전력소모, 총투자비용이 낮아 생성형 AI 데이터센터에서 GPU의 대체재로 주목 받고 있다. 또 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등 기존 서버, PC와 다른 특수 목적용 칩 시장에서도 ASIC이 필수재로 여겨지고 있다.
17일 주요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구글, 메타, 바이트댄스 등 빅테크 기업들이 데이터센터 운용에 필요한 맞춤형 반도체로 ASIC 개발에 투자하고 있으며, 미국 브로드컴과 파트너십을 맺고 오는 2027년까지 100만개가 넘는 AI 칩을 데이터센터에 탑재할 것으로 관측된다. 해당 시장에서 최대 900억달러(129조원)에 달하는 매출이 발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기존 시장조사업체들의 전망을 크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ASIC은 일반적인 집적회로와 달리 특정한 용도를 겨냥해 제작된 맞춤 주문형 반도체를 말한다. 과거 AI 전용 ASIC은 개발 기간이 오래 걸리고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 소수의 IT 대기업을 중심으로 개발이 추진됐다. 가장 대표적인 ASIC은 과거 구글 딥마인드 알파고의 핵심 하드웨어인 텐서프로세서유닛(TPU)이다. 이후 ASIC은 대형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를 거쳐 뛰어난 성능과 전성비(전력 대비 성능 효율), 빠른 개발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게 됐다.
현재까지는 브로드컴이 업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브로드컴은 최근 실적발표에서 지난 1년간 생성형 AI 인프라 수요 급증으로 AI 관련 매출이 220% 증가했다고 밝힌 바 있다. 브로드컴은 또 “대형 클라우드 기업 3곳과 맞춤형 AI 칩을 개발 중”이라며 “향후 3년간 AI에서 기회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 3곳은 구글과 메타, 그리고 ‘틱톡’을 운영하는 중국 바이트댄스다.
브로드컴이 세계 최대 데이터센터 투자 기업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지난 14일(현지시각) 브로드컴의 시가총액은 1조640억달러로 불어나 ‘1조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시총 순위도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1조420억달러)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9925억8000만달러)를 제치고 8위로 뛰어올랐다.
일본 기업들의 공세도 거세지고 있다. 2022년 신일본라디오 주식회사와 리코 일렉트로닉 디바이스의 합병을 통해 출범한 닛신보 마이크로 디바이스는 자동차 분야 ASIC 시장에서 존재감을 점점 확대하는 중이다. 공식 출범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유럽 대형 자동차 기업 7곳을 고객사로 확보해 이미 ASIC 칩 제품군을 인증 받아 공급을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미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대하는 중이다. 지난 1990년 설립된 시스템 반도체 기업인 메가칩스도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싸이타임(Si타임)을 2억달러에 인수하면며 웨어러블, IoT 분야에 특화한 ASIC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중국 역시 바이두, 바이트댄스 등 주요 빅테크를 중심으로 ASIC 투자가 이뤄지는 중이다. ASIC 전문 기업인 마이크로BT 등은 현재 미국, 한국 등지에서 고가의 ASIC IP(설계자산)를 매입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기존 반도체 산업 트렌드보다 2~3년 선행하는 IP 산업의 특성을 감안하면 중국 역시 수년 내 ASIC 분야 진출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라며 “내수 시장이 방대한 중국은 전문 ASIC 업체들이 성장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JP모건은 앞선 보고서에서 현재 제조를 제외한 설계 시장 규모만 200억~300억달러 규모에 달하며 ASIC 시장이 장기적으로 연간 2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특히 브로드컴이 55~6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지배적인 기업으로 군림할 것으로 관측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 역시 오는 2030년까지 대부분의 AI 워크로드가 ASIC에서 처리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