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판매 세계 1위 삼성전자가 유럽 시장에서 판매 중단 위기에 몰렸다. 유럽연합(EU)이 내년 3월부터 새 TV 에너지효율지수(EEI)를 도입하는데, 삼성전자가 주력으로 삼고 있는 4K 액정표시장치(LCD) TV는 물론이고 8K 고해상도, 마이크로발광다이오드(LED) 모두 새 환경규제를 충족하지 못한 탓이다. 유럽은 북미와 함께 세계 TV 시장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어 삼성전자가 해당 시장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다소 우려 섞인 분석이 나온다.

19일 TV 업계 및 EU 등에 따르면 내년 3월부터 EU 회원국에서 TV를 판매하려면 지금보다 낮은 수준의 최대전력 소비기준을 맞춰야 한다. 앞서 2021년 3월 시행된 TV EEI는 HD(1280×720)의 경우 0.9, 4K UHD(3840×2160) 1.1을 만족하면 된다. 8K UHD(7680x4320)와 마이크로LED의 경우는 별다른 규제가 없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 TV 제조사들은 8K TV나 마이크로LED TV의 경우 환경규제를 피해 판매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가 지난 9월 독일 베를린 IFA 2022에 전시한 8K 미니LED TV 네오 QLED. /삼성전자 제공

EU는 기후변화나 지정학적 위기에 따른 에너지 대란으로 최근 에너지효율이 높은 가전제품을 강조하고 있다. TV는 가전 중에서도 전기를 많이 소모하는 대표적인 기기다. 기존 LCD TV의 경우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에너지효율도 향상되는 모습을 보여왔으나, 미니발광다이오드(LED), 마이크로LED 등 고화질 기술의 등장으로 에너지효율 향상에 역행하는 흐름도 나타났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는 저전력 소자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이 역시 화질을 높이거나 화면 크기를 키우면 전기를 많이 소모하기는 마찬가지다.

내년 EU가 도입하려고 하는 새 TV EEI는 HD 0.9, 4K 및 8K UHD·마이크로LED 1.1이다. 업계는 EU의 조치가 일방적인 규제라며 항의했으나, EU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마렉 마제스키 TCL유럽 제품개발 이사는 “이런 일이 발생하면 더 이상 8K는 없다”라고 했다.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8K 연합은 성명을 통해 “무언가 변경되지 않으면 2023년 3월은 8K 규제로 새 산업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라며 “8K TV의 전력 소비 제한이 너무 낮아 어떤 장치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소비전력을 낮추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화면의 휘도(밝기)를 낮추는 것이다. 업계는 내년 EU 규제에 맞춰 제조사들이 TV 제품의 성능을 인위적으로 저하시키는 방법으로 규제를 피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경우 제조사가 강조하는 디스플레이 패널의 고화질 장점이 희석되는 역효과가 나타난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업계는 에너지효율을 중시하는 최근 경향에 공감하면서도 엄격한 환경규제가 이미 둔화한 TV 수요를 더욱 끌어내릴 수 있다고도 여긴다. 환경규제가 기술 발전을 저해해 새 수요 창출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만일 규제가 현실화 되면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8K TV의 휘도를 비롯한 성능을 낮춰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제품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라며 “아직 규제 시행까지는 시간이 다소 남은 관계로 제조사들은 대책 마련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그래픽=이은현

새 EU 규제를 토대로 덴마크 TV·디스플레이 전문매체 플랫패널HD가 최대전력을 추산한 결과, 55인치 4K·8K는 84W, 65인치는 112W, 75인치는 141W, 77인치 148W, 83인치 164W, 85인치 169W, 88인치 178W를 만족해야 한다.

TCL이 지난 9월 독일 베를린 IFA 2022에서 소개한 미니LED TV. /연합뉴스

유럽에서 판매 중인 인기 제품에 대입하면 42인치 4K TV와 48인치 4K TV는 큰 어려움 없이 기준을 충족한다. 그러나 현재 TV 주력하고 있는 55인치 이상으로 체급을 키울 경우에는 상당수의 TV가 에너지효율 기준을 초과한다.

먼저 55인치 4K TV는 시간당 최대 84W를 맞춰야 하는데, 삼성전자의 55인치 미니LED TV는 93W로 기준을 넘어간다. 반면 같은 크기의 소니 OLED TV, 퀀텀닷(QD)-OLED TV는 각각 83W, 84W로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맞춘다. 파나소닉과 필립스의 OLED TV는 각각 83W, 84W다. LG OLED TV는 81W로 경쟁 제품 중 가장 낮았다. 55인치 8K TV는 삼성전자 미니LED TV가 193W로 기준을 한참 초과했다.

그래픽=이은현

최대 112W를 충족해야 하는 65인치 4K TV는 소니와 삼성전자가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LG와 소니의 OLED TV가 각각 97W, 96W로 나타났다. 이들은 모두 LG디스플레이의 OLED 패널을 쓴다. 소니 QD-OLED TV의 경우 113W, 삼성 미니LED TV는 122W를 기록했다. 필립스 OLED TV는 112W로 기준에 턱걸이했고, 파나소닉 OLED TV는 103W로 나타났다.

65인치 8K TV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중국 TCL이 판매 중이다. 모두 기준을 두 배쯤 초과한다. 삼성과 TCL의 미니LED TV는 각각 219W, 287W다. LG 미니LED TV는 195W로 나타났다.

LG전자가 지난 9월 독일 베를린 IFA 2022에서 소개한 세계 최대 크기 97인치 올레드 에보 갤러리 에디션. /박진우 기자

75~77인치 4K TV는 최대전력이 141~148W에 분포한다. 삼성전자, LG전자, 소니, 필립스 제품이 모두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 반면 8K TV는 얘기가 달라진다. LG 미니LED TV는 219W, 삼성 미니LED TV 2종은 각각 247W, 303W, TCL 미니LED TV는 356W, LG OLED TV는 248W로 조사됐다.

83~85인치 4K TV도 기준을 넘는 제품은 없었다. 그러나 8K TV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미니LED, LG전자의 OLED 제품이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TV의 고화질·대형화 추세는 에너지효율을 중시하는 최근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에너지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출시한 삼성전자 TV 65개 가운데 에너지효율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평가받는 4등급과 5등급 제품은 각각 50.8%, 4.6%로 나타났다. 대부분은 미니LED TV나 65인치 이상 대화면 제품이다. LG전자 역시 올해 출시한 37개 중 절반 이상인 20개 제품이 에너지소비효율 4~5등급을 받았다. 업계 관계자는 “TV는 전기를 많이 소모하는 대표적인 가전이지만, 여러 방안을 통해 에너지효율을 높이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