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현지 시각) 스위스 취리히 시내에서 차로 30여 분 떨어진 뒤벤도르프의 스위스 이노베이션 파크. 거대한 직사각형 박스 형태의 '스페이스 허브' 건물로 들어서자 길이 5m 내외의 로켓들이 서 있었다. 로켓마다 비욘드 그래비티, 맥슨, 켈러 등 스위스 우주 기업들의 로고가 붙어 있었다. 곳곳에는 로켓 엔진과 우주 탐사용 로봇 모형이 놓여 있었다.

지난 3월23일(현지 시각) 스위스 뒤벤도르프 스위스 이노베이션 파크 취리히 내 위치한 '스페이스 허브' 건물 내부. '유럽의 MIT'로 불리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ETH) 소속 우주공학 학생 단체 ARIS가 개발한 로켓들이 진열돼 있다. / 김송이 기자
ARIS에서 우주 탐사 로봇을 만드는 팀 '폴라리스'의 부매니저 리차드 루딘(22)이 자신들이 진행한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 중이다. /김송이 기자

겉보기에는 우주 기업의 연구실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모교이자 '유럽의 MIT'로 불리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ETH) 소속 우주공학 학생 단체 아리스(ARIS)의 '베이스 캠프'다. 2017년 ETH의 한 강의실에서 시작한 ARIS에는 현재 300여 명의 학생이 3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강의 시간에 배운 이론을 실습 프로젝트를 통해 검증하는 것이다. ARIS의 로켓 연구팀 '아스테리아'는 유도 회수 시스템을 탑재한 재사용 로켓 '니콜리에(NICOLLIER)'를 개발·발사해 미국 CNN에 소개되기도 했다.

ARIS는 ETH에서 시작됐지만 자금 모금 등 프로젝트 운영은 모두 학생들의 몫이다. 학교는 교수진이 필요할 때 자문을 제공하고, 학생들의 실무 연구 시간을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ARIS에서 우주 탐사 로봇을 만드는 팀 '폴라리스'의 부매니저 리차드 루딘(22)은 "이 프로젝트는 대학 교육 과정의 일부로 학습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모두 엔지니어를 목표로 하는 만큼 반드시 실무 경험이 필요하다. 이론만 배운 엔지니어를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는 없다"며 "값비싼 실제 장비를 직접 다루며 경험을 쌓고, 나중에 현장에서 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 실패를 자산으로 만드는 대학

자체 프로젝트를 통한 실무 경험은 일부 학생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ETH 스페이스 허브에는 ARIS와 같은 팀이 10여 개 상주하며 이론을 실무에 접목시키고 있다. ETH 캠퍼스 내에는 우주 탐사 로봇을 집중 연구하는 '로봇X 랩'도 있다. 이곳에서 개발된 곤충형 점프 로봇 '스페이스 호퍼'가 유럽우주국(ESA)과의 시험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칠 정도로 학생 주도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 3월26일(현지 시각)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교(EPFL)의 'MAKE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소형 위성 팀 '스페이스 크래프트', 화성 탐사 로봇을 제작하는 '익스플로어' 소속 학생들 모습 / 김송이 기자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교(EPFL)의 'MAKE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로켓 팀 학생들이 자신들이 만든 로켓 앞에 서 있다. / 김송이 기자

스위스의 다른 대학들도 학생들의 실무 경험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로잔연방공과대학교(EPFL)의 '메이크(MAKE)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EPFL의 우주 연구·교육 총괄 조직인 '우주 센터(Space Center)'가 공간과 일부 자금을 지원하고 지도 교수를 연결해주면, 팀 구성과 운영은 학생들이 맡는다. 학생들은 자체 기준으로 학부·대학원생을 선발하고, 기업에 직접 연락해 자금 지원을 받는다. 대표적으로 소형 로켓을 개발하는 '로켓 팀', 소형 위성 팀 '스페이스 크래프트', 화성 탐사 로봇을 제작하는 '익스플로어' 등이 있다.

자율성이 높은 만큼 실패의 책임도 학생들의 몫이다. 그러나 지난 26일 EPFL에서 만난 학생들은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로켓 팀 소속 팔로마 가르시아(23)는 "재작년 유럽 대학생 로켓 대회에서 낙하산이 작동하지 않아 착륙에 실패했다. 지난해에도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아니었지만 낙하산이 정상 작동한 것만으로도 모두가 기뻐했다"며 "우리는 무언가 성취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서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배운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자연스럽게 창업으로 이어진다. ETH는 1973년 이후 661개의 스타트업을 배출했고, EPFL에서도 5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탄생했다. 우주 쓰레기 제거 기술로 유명한 '클리어 스페이스'가 EPFL에서 분사된 스타트업이다. 인구 10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스위스가 혁신 강국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이론을 실무로 검증하고, 실패를 자산으로 축적하는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재 육성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10대부터 시작되는 현장 교육

스위스의 혁신 인재 양성 시스템은 대학 이전 단계에서도 진행된다. 혁신 경쟁력의 핵심이 '사람'인 만큼, 인재 양성은 고등교육에만 머물지 않는다. 스위스에서는 의무교육이 끝나는 중학교 졸업 시점에 전체 학생의 약 3분의 1만이 대학 진학을 위한 일반 교육 과정을 선택한다. 나머지는 실무와 이론을 병행하는 직업교육(VET) 과정을 택한다. VET 견습생들은 일주일 중 1~2일은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3~4일은 기업에서 실무 교육을 받는다.

지난 3월25일(현지 시각) 스위스 베른대 우주 연구 및 정밀 기계 실습실에서 근무 중인 2년 차 기계 기술자(Polymechanic) 견습생 루카 가우치(18)가 설명 중이다. / 김송이 기자

기 파르믈랭 스위스 대통령과 스위스 최대 금융그룹 UBS의 세르지오 에르모티 최고경영자(CEO) 등이 VET 과정을 거쳐 고위직에 오른 사례에서 보듯, 직업 교육의 성과도 높다. 이 제도의 장점은 학생들이 대학 진학 전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진로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약 250개 직종에서 이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일부 견습생은 과정 종료 후 심화 학습을 위해 대학에 진학하기도 한다.

지난 25일 만난 2년 차 기계 기술자(Polymechanic) 견습생 루카 가우치(18)는 일주일에 3일 베른대 우주 연구 및 정밀 기계 실습실에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고 있다. 그는 "학교 공부가 어렵고 흥미도 크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일하며 우주공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VET 과정을 마친 뒤 대학 진학 자격을 얻게 되면 대학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VET 과정은 개인의 진로 탐색을 넘어, 스위스 산업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된다. 시르파 치말 스위스무역투자청 글로벌 마케팅 디렉터는 "스위스에는 세계적인 대학과 직업 교육이 병행되는 이원화된 교육 시스템이 있다"며 "이 구조가 곧바로 산업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실무형 인재를 키워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