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이 4주 차에 접어든 가운데 해상 물류난이 불지핀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품귀 현상이 한 체급 아래 선종인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 발주 랠리로 이어지고 있다. 유조선이 가뜩이나 부족한 상황에서 초대형선 매물이 동나자, 다급해진 선사들이 대체재 확보에 뛰어든 결과다. 이런 대체 수요가 신조 발주로 이어지며 수에즈막스급에 특화된 대한조선이 수혜를 누리고 있다.
원유 운반선은 크기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가장 큰 VLCC는 한 번에 원유 200만배럴을 실어 나를 수 있는 30만톤급 선박이다. 200만배럴은 우리나라 하루 석유 사용량에 맞먹는 규모다. 수에즈막스는 VLCC의 절반 수준인 15만톤급으로, 수에즈 운하를 만재 상태로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선박이다.
◇공급 가뭄에 전쟁까지 덮쳤다… 발주 잔량 14년 만 최고
28일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업체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최근 전 세계 수에즈막스급 신조선 발주 잔량(오더북)은 기존 운항 선대의 25% 규모로 치솟았다. 전 세계에서 운항 중인 수에즈막스 선박 4척당 1척 분량의 신규 주문이 조선소에 들어간 상태라는 뜻이다. 이는 원유 등 액체 화물을 운반하는 전체 탱커선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며 수에즈막스급 기준으로는 14년 만에 최고치다.
유조선 시장에 누적된 공급 가뭄에 전쟁이 도화선으로 작용하면서 수에즈막스 수요에 불을 당겼다. 전 세계 수에즈막스 선대 689척 중 40%인 273척이 선령 15년을 넘긴 노후선이다. 엑슨모빌, BP, 토탈 등 전 세계 오일 메이저 사이에서는 선령 15년이 넘어간 선박에는 화물 운송 승인을 내주지 않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따라서 이 배들은 사실상 주요 항로에서 밀려나 있다.
여기에 러시아, 이란 제재를 피해 다니는 이른바 그림자 선박(다크 플릿)이 수에즈막스 선대에서만 116척에 달한다. 이들의 평균 선령은 21.8년으로 역시나 노후화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지난 3주간 사실상 봉쇄되며 인근 해역에 원유 운반선들의 발이 묶였다. 그나마 가용한 선박들도 기존 항로 대신 우회로를 택하며 운항 거리가 늘어났다.
결국 유조선이 더 부족해진 와중에 원유를 실어 나르려는 용선 수요는 치솟았고 용선료는 부르는 게 값이 된 상황이다. 최근엔 VLCC 하루 용선료가 80만달러(약 12억원)까지 올랐다. 마음이 급해진 선사들이 한 번에 가장 많은 원유를 실어 운송 효율이 높은 VLCC 매집에 나서면서 시장에 매물이 마르자,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으로 수요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장금상선·MSC, VLCC 싹쓸이에 대안으로 떠오른 수에즈막스
이 판에 불을 지핀 건 장금상선이다. 장금상선은 원유 운반선 수요가 줄어든 코로나19 이후 2022년부터 유조선 노후화에 따른 수요를 내다보고 중고선 매집에 나섰다. 작년 말부터는 세계 최대 해운사 MSC와 손잡고 매집을 본격화했다. 이들이 확보한 VLCC는 최대 150척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주요 유조선 선대의 약 4분의 1을 싹쓸이한 셈이다. 시장 매물이 말라붙은 가운데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VLCC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자, 선주들이 그보다 규모가 작은 수에즈막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선사 입장에선 한 번에 많은 원유를 싣는 VLCC를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미 중고선은 씨가 말랐고, 신조 주문을 넣어도 3년은 기다려야 한다"며 "이에 수에즈막스 2척을 운용하면 VLCC 1척과 비슷한 물량을 처리할 수 있어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MSC가 장금상선과 VLCC를 매집한 데 이어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 시장 진입도 저울질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수요가 한층 더 달아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수에즈막스 '수주 랠리' 대한조선, 최고 선가 행진
국내에서는 중형 조선사 대한조선이 이 흐름의 대표적인 수혜자로 꼽히고 있다. 대한조선은 올해 1월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 6척, 2월 2척을 수주한 데 이어 3월 16일과 20일 연달아 계약을 따냈다. 올해 전 세계에서 발주된 수에즈막스급 41척 가운데 약 4분의 1을 대한조선이 가져간 것이다. 현재 대한조선의 수주 잔량은 수에즈막스 28척을 포함해 총 34척으로 약 3년 6개월 치 일감을 확보했다.
대한조선이 수주한 수에즈막스급 선가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9월 말 척당 8500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192억원) 수준이던 수에즈막스 신조 가격은 최근 8950만달러(약 1330억원)까지 뛰었다. 대한조선 관계자는 "공급망 불안 속에 안정적인 배를 먼저 확보하려는 선주들의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며 "중동발 물류 환경 변화로 수에즈막스를 비롯한 원유 운반선 수요는 한동안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이 파급 효과가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에서 멈추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수에즈막스급보다 작은 10만톤급 아프라막스도 전체 선대의 48%가 선령 15년을 넘겨 교체 수요가 높은 데다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