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측과 근로자들이 합의한 소정근로시간이 실제 일하는 시간보다 크게 적다면 근로계약이 무효라고 볼 소지가 크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에 따라 소송을 제기한 울산 택시기사들은 사측이 기존에 지급한 것 외에 추가 임금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 제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14일 울산시에서 택시기사로 근무하는 박모씨 등이 택시회사 18곳을 상대로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택시기사들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박씨 등은 2012년부터 2019년까지 택시회사 18곳에서 근무했다. 이들은 1명의 택시기사가 한 대의 택시를 전담해 매일 운행하는 방식으로 근무했다. 택시를 받은 요금(수입금)에서 일정액(사납금)을 택시회사에 납입하고 남은 금액(초과운송수입금)을 택시기사들이 가져갔다. 이외에 택시회사들은 기본급과 수당 등의 명목으로 택시기사들에게 일정한 금액의 고정급을 지급했다. 이 같은 임금 지급 방식을 '정액사납금제'라고 한다.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특례조항이 신설돼 2009년부터 택시기사에 적용되는 최저임금에서 '생산고에 따른 임금'이 제외됐다. 기존에는 택시기사가 받는 임금이 고정급과 초과운송수입금을 합쳐 최저임금보다 많으면 괜찮았지만, 개정된 법에 따르면 고정급이 최저임금보다 많아야 한다.
최저임금은 매년 인상됐고, 택시회사가 기사들에게 지급하는 고정급이 최저임금법을 위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자 노사 양측은 소정근로시간을 대체로 서서히 줄여왔다. 소정근로시간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합의해 근로계약서에 명시한 근로시간이다.
소정근로시간은 택시회사마다 다르게 정해졌다. A업체는 2004년 4시간에서 2018년 2시간30분으로 줄었고, B업체는 2006년부터 2016년까지 2시간으로 유지됐다. 소정근로시간은 대체로 2~3시간 수준이다.
그러던 중 대법원은 2019년 4월 전원합의체 판결로 실제 근로환경 변화 없이 소정근로시간만 줄인 것은 탈법이어서 무효라고 판단했다.
그러자 박씨 등은 자신들에게 적용된 소정근로시간 단축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택시기사들의 실제 근무시간을 알 수 있는 출퇴근 내역이 없으므로, 택시회사가 지급해야 할 최저임금과 퇴직금은 소정근로시간 '1일 8시간'을 기준으로 계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측에 1일 8시간 기준으로 계산된 임금과 사측이 지급한 고정급·퇴직금의 차액,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했다.
1심은 박씨 등에게 전부 패소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소정근로시간 단축 협의는 택시회사는 사납금 증액을 최소화하면서 최저임금법 저촉 문제를 피하고, 택시기사도 사납금 증액을 최소화하면서 초과운송수입금을 종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끝에 노사 양쪽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서 "효력을 부정할 정도로 위법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2심은 원고 1명의 청구를 받아들였으나 항소한 나머지 8명에 대해 1심과 같이 패소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한 택시회사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가 폭등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가 사납금 인상 자제를 권고하자 택시기사들과 소정근로시간을 단축해 고정급 지급 증가를 억제하는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반면 대법원은 노사간 소정근로시간 단축 합의에 대해 "최저임금법 특례조항 적용을 회피하기 위한 탈법행위로 무효라고 볼 소지가 크다"며 무효로 판단했다.
또 한 택시회사의 소정근로시간이 '1일 2시간'인 것에 대해서는 "임시, 일시 근로자가 아닌 통상 근로자가 초단시간근로자(1주 15시간 미만 근무)로 인정되는 소정근로시간을 정한다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면서 무효로 봤다.
이번 판결에 따라 부산고등법원은 택시기사들의 실제 근무 형태를 감안한 임금을 재산정해 택시회사에 지급을 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소정근로시간이 실제 근로시간과 현저히 괴리되어 비현실적으로 정해지는 등 형식에 불과하거나 주된 목적이 최저임금법 적용을 회피하는 것이었다면 그런 소정근로시간의 정함은 무효라고 봐야 한다는 새로운 법리를 판시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