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에 대한 일본 엔화 가치가 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진 가운데 일본 증시마저 초강세를 보이면서 엔화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일본 여행과 환차익을 노리기 위해 원화를 엔화로 바꾸는 환전 규모가 작년 이맘때의 약 5배에 이르고, 최근 두 달간 국내 투자자의 일본 주식 순매수 규모가 앞선 2년간의 규모를 뛰어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우리·하나 등 국내 4대 시중은행의 5월 기준 엔화 매도액은 301억6700만엔(약 2732억원)으로 파악됐다. 이는 4월에 은행이 고객의 요구에 따라 원화를 받고 엔화를 내준(매도) 환전 규모가 한 달 만에 73억2800만엔 증가한 규모다.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4.8배가량 늘었다.
4대 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도 지난달 말 6978억5900만엔(6조3197억원)에서 이달 15일 8109억7400만엔(약 7조3441억원)으로 16%(1131억1400만엔·약 1조243억원) 늘었다. 작년 6월말 잔액(5862억3000만엔)보다는 38% 많은 수치다.
엔저(低) 현상과 더불어 일본 증시가 33년 만에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국내 투자자들은 일본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 증시의 대표 지수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는 지난 14일 3만3502.42엔으로 거래를 마쳤다. 닛케이지수가 심리적 저항선으로 불리는 3만3000엔을 넘긴 것은 거품 경제 시기인 1990년 7월 이후 처음이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자본총계 기준 상위 8개 주요 증권사(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삼성·하나·KB·메리츠·신한투자증권)에 예치된 엔화 예수금 및 일본 주식 평가금액 전체 규모는 지난 15일 기준 총 4조946억2000만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1년 전인 지난해 6월 말(3조1916억원)보다 9000억원 이상(28.3%) 늘어난 수준이다. 지난 1월 말(3조4924억5000만원)과 비교해도 6000억원 이상(17.2%) 증가했다.
엔화 가치가 낮을 때 일본 주식을 매입해 보유하고 있다가 향후 엔화가 강세로 전환하면 팔아 환차익을 노리는 수요도 더해졌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최근 두 달간의 순매수 규모 합계(약 5293만1000달러)를 원화로 환산하면 674억원 수준이다. 이는 앞선 2년 치(2021년 4월∼올해 4월)의 순매수 규모(약 401억원)보다도 많은 수준이다.
지난달 국내 투자자의 일본 주식 매수 건수는 7757건으로 올해 1∼4월 평균 건수인 5625건을 훌쩍 넘어섰다. 이달도 아직 반이나 남았지만 매수 건수는 이미 5900여건에 달한다.
최근 엔저 현상이 심해지면서 엔화 환전이나 예금, 일본 주식에 대한 금융 소비자의 관심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6일 오후 3시 30분 기준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903.82원으로, 2015년 6월 26일(905.40원) 이후 약 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엔화는 달러·유로 등에 대해서도 약세다. 지난 15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장중 엔화는 1유로당 152엔을 넘어서 2008년 9월 이후 최고 기록을 세웠고, 엔·달러 환율도 1달러당 141엔대로 작년 11월 이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미국과 유럽의 통화 긴축 기조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만 완화 정책을 고수하면서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일본은행은 16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일본은행 단기금리를 마이너스(-0.1%) 상태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금리를 0% 수준으로 유지했다. 시장에서는 이런 기조가 유지되면 원·엔 환율의 경우 100엔당 800원대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