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40대 의사 김 모씨는 지난해 초 결성된 개인투자조합을 통해 한 벤처회사에 1억원을 투자했다. 3년 전부터 비상장 헬스케어 스타트업와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등에도 각각 수천만원을 잇따라 투자했다.김 씨는 “과거 초기 투자한 기업이 증권시장에 상장되고 이후에도 성장 가도를 달리면서 큰 수익을 본 경험이 있다”면서 “상장 주식에 비하면 초기 투자 위험성(리스크)이 있지만, 매일 주가 등락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면서 절세 효과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소득이 늘어도 불어난 세금과 치솟은 물가 탓에 자산을 불리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다. 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김 씨처럼 비상장 스타트업을 찾아 일찍이 투자하려는 고소득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국내 개인투자조합 신규 결성액과 신규 투자 규모는 최근 5년간 성장했다.
개인투자조합은 개인 또는 법인이 최소 1억원 이상을 출자해 창업‧벤처기업에 출자금총액의 50% 이상 투자하고 수익을 얻는 목적으로 결성해 중소벤처기업부에 등록한 조합을 말한다. 지난 2021년 조합 결성액은 종전 역대 최대인 2020년(3324억원) 대비 약 2배 늘어 6278억원이었다. 신규 결성 조합 수도 역대 최다인 2020년(485개)보다 약 2배 증가한 910개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개인이 늘어난 데는 소득 공제 혜택과 규제 완화가 한몫했다. 초기 투자로 미래에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이른바 ‘잭팟’ 기대 심리와 저금리 덕에 시장에 돈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개인투자조합으로 벤처기업에 투자하면 3000만원까지 100% 소득공제 받을 수 있다.
비상장 스타트업 투자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신생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해 조합을 만들어주는 컨설팅기업을 통해 출자에 참여하거나 중기부 산하 엔젤투자지원센터를 통해 투자자와 투자유치 희망기업을 매칭해주는 ‘엔젤투자마트’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금융투자협회 비상장주식 거래 시스템 ‘K-OTC’를 통해 비상장회사의 장외 주식을 매매해 비상장기업에 투자할 수도 있다.
정부는 지난 2018년 엔젤투자 활성화를 위해 투자금의 소득공제 금액 기준을 기존 15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확대했다. 5000만원까지는 70%, 5000만원을 넘는 금액에 대해서는 30%까지 소득공제 혜택이 적용된다. 또 2020년 조합 재산 운용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창업‧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의무 비율을 기존 출자금 전액에서 50% 이상으로 대폭 완화했다.
소득세는 개인이 1년간 얻은 소득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이다. 과거 4·5단계였던 과세표준 구간은 지난 2017년 6단계로 늘었고, 이어 2018년 7단계를 거쳐 2021년부터 8단계로 확대됐다. 과세표준은 각종 공제나 비용 등을 덜어내고 실제로 세금을 매기는 금액이다.
과표구간이 세분화되면서 고소득자의 세금 부담도 커졌다. 근로자가 소득세를 덜 내려면 공제를 받아 과세표준을 낮춰 적용 세율을 줄이는 게 절세 기술의 핵심이다. 다른 절세 수단과 비교하면 벤처 투자를 통한 공제 혜택은 제법 큰 편이다.
가령 총급여가 1억원인 개인투자자가 개인투자조합을 통해 A벤처기업에 3000만원을 투자(출자)한 경우 총 79만2000원(소득세 공제 72만원, 주민세 공제 7만2000원)의 세액 공제 효과를 볼 수 있다. 총급여가 1억5000만원인 투자자가 1억원을 투자한 경우, 세액 공제 금액은 2099만750원이다.
지난해 발표된 2021년 소득공제 신청 기준 벤처 초기투자자(엔젤투자자) 수는 1만4195명이었다. 여윳돈이 있고, 자산 분산 관리와 증식에 관심이 많은 자산가에게 비상장 스타트업 투자가 주요 투자처로 떠오르기도 했다.
KB금융그룹이 금융자산이 10억원 이상 보유한 30~49세 신흥부자와 20억원 이상 보유한 50대 이상 전통 부자를 나눠 분석한 결과, 전통부자의 자산 증식 수단에는 부동산이 큰 반면 신흥부자 자산증식의 가장 주된 방법은 비상장·상장 주식 투자(54%)였다. 이 외에 예·적금, 디지털자산, 부동산 등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구성했다.
김현섭 KB국민은행KB GOLD&WISE 한남 PB센터장은 “최근 고액 자산가들은 절세 방안과 함께 자산 포트폴리오를 분산·조정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크다”면서 “금리 인상과 경기 부진 등으로 시장의 투자 심리가 전반적으로 위축됐지만, 고액 자산가들이 경험을 기반으로 위기를 기회로 보는 경향이 짙어 단기 수익보다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하려는 심리가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창업투자회사나 액셀러레이터(창업기획자)가 만든 벤처펀드에 비하면 개인투자조합을 통한 투자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도 장점이다. 창업투자회사의 벤처펀드 최소 출자금은 20억원, 액셀러레이터가 만든 벤처펀드의 최소 출자금은 10억원이다. 참여 인원도 49명으로 제한된다.
박미라 미라파트너스 대표는 “법적으로 최소 투자 금액 단위가 100만원이고 벤처 투자에 대해선 세금 공제 혜택이 있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개인 투자자들의 관심이 커졌다”면서 “가치 있는 회사를 발굴만 잘한다면 개인도 벤처 투자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불특정 일반인이 개인투자조합을 통해 비상장 회사에 투자하는 기회를 얻는 게 쉽지는 않다. 개인투자조합은 일반 금융기관에서 판매하는 상품이 아니다. 기술을 지닌 창업자와 액셀러레이터, 신기술 창업전문회사 라이선스 법인 등이 주축이 돼 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원을 49명으로 제한하는 특성 상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있다.
세계 여러 국가들이 엔젤 투자 활성화를 위한 지원책과 제도를 확대하는 추세다. 미국벤처연구센터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미국의 엔젤투자자는 36만3460명으로, 신생 기업 6만9000곳에 투자한 것으로 추산됐다. 할리우드 배우 애쉬튼 커쳐도 미국 숙박 공유 플랫폼 에어비앤비(Airbnb), 차량공유 플랫폼 우버(Uber) 등 177개 스타트업에 초기 투자해 큰 이익을 거둔 엔젤투자자로 유명하다.
단, 기업 초기 투자인 만큼 위험성도 커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최근 세계적인 금리 인상과 경기 둔화에 따른 유동성 축소, 증시 부진 등의 영향으로 벤처기업 투자 시장도 위축되고 있다. 더구나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을 보는 안목과 정보도 필요하다.
유념해야 할 점은 또 있다. 벤처 투자에 대해 소득공제를 받은 뒤, 3년이 지나기 전에 조합의 출자 지분을 양도하거나 조합이 원금을 중간 분배하는 경우 세금을 다시 내야 한다. 추징 대상이 되면 연말정산을 재계산해 자진 신고 납부해야 한다. 3년이 지나기 전 출자원금을 중도에 분배받거나, 출자자산의 양도를 계획하고 있다면 소득공제를 받지 않는 편이 낫다. 단, 3년 경과 전에 조합이 청산돼 출자금을 분배받는 경우 예외로 추징하지 않는다.
벤처투자조합과 신기술투자조합, 창업벤처투자에 대한 소득공제 절차는 간단한 편이다. 국세청 홈택스를 통해 공제신고서를 작성·제출하거나 PDF를 회사 연말정산 담당자에게 제출하면 된다. 국세청 홈텍스 공제신고서 상에 ‘그 밖의 소득공제(기타)’ 내역에 출자 금액과 조합명, 계좌번호를 입력하면 본인 소득에 따라 공제금액이 자동 계산된다.
한편,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7월 발표한 세제개편안을 통해 최저 소득세율 6%에 해당하는 구간을 ‘과세표준 1200만원 이하’에서 ‘1400만원 이하’로 높였다. 두 번째로 낮은 세율인 15% 구간은 ‘1200만원 초과~4600만원 이하’에서 ‘1400만원 초과~5000만원 이하’로 상향 조정했다. ‘4600만원 초과~5000만원 이하’ 근로소득자에는 이전 세율(24%)보다 9%포인트 낮은 세율을 적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