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로아이 루잇 하이 바콩 (바콩으로 결제됐습니다)”
지난 9일 오전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는 중앙시장. 오전 이른 시간임에도 시장은 현지인은 물론 해외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프놈펜 최대 규모 시장인 이곳은 식품, 의류, 귀금속, 주류 등 다양한 종류의 가게가 복도 사이를 따라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매대 위 품목은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가게 매대 한 편에는 QR코드가 비치돼 있었다.
캄보디아중앙은행(NBC)은 2020년 10월 블록체인 기반 결제시스템 바콩(Bakong)을 출시했다. 카드 중심 결제가 이루어지는 한국과 달리, 캄보디아 바콩은 QR코드를 통해 계좌 중심 결제를 돕는다. 코로나19 이후 QR페이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캄보디아 QR페이는 국가 주도 결제시스템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바콩은 과거 은행별 호환되지 않던 QR코드를 통합한 결제 플랫폼이다. 송금인이 수취인의 QR코드를 스캔해 결제하면 송금인이 이용하는 은행으로 전송된 결제 정보가 바콩으로 전달되고, 이것이 다시 수취인이 이용하는 은행으로 전달돼 결제가 이루어진다. 바콩이 송금인과 수취인이 이용하는 각각의 은행을 잇는 중계은행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송금인과 수취인은 별도의 수수료 없이 바콩을 이용할 수 있다. 현재 은행, 금융기관 및 결제 서비스 제공업체 등 총 34개사가 바콩 멤버십을 부여받았다. 국내 은행인 KB국민은행, 우리은행, 신한은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날 캄보디아 은행 계좌를 보유한 현지인 도움을 받아 직접 바콩을 이용해 볼 수 있었다. 스마트폰에서 현지 은행 애플리케이션(앱)이나 바콩 앱을 실행하고서 QR코드를 카메라로 읽히면, 결제 금액을 입력할 수 있었다.
QR코드는 캄보디아 화폐 리엘화와 달러화 버전 두 가지 모두 존재한다. 점포명과 적용 금액 등을 확인한 후 최종 결제 내역을 제시하면 끝이다. 이렇게 4300원(3.25달러)을 지불하고 망고 쉐이크 두 개를 구매할 수 있었다.
중앙시장에서 식료품을 판매하는 와 완뎃씨(39)는 “코로나19 이전에 캄보디아는 주로 현금으로 돈을 주고받았는데, 바콩 출시와 코로나19 이후 바콩을 통한 QR코드로 대부분 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며 “중앙은행이 책임지는 만큼 상인들 사이에서 호응이 좋다”고 말했다.
바콩의 활용도는 다양했다. 호텔, 시장, 카페 등은 물론이고 캄보디아의 대표적 교통수단인 툭툭에서도 바콩을 이용할 수 있었다. 툭툭은 운전석이 외발, 뒷자석이 두 발인 삼륜차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 등받이에는 바콩 QR코드가 있었다. 툭툭 역시 결제 금액을 입력하고 나서 운전자에게 결제 내역을 제시하면 된다. 앱 접속부터 결제 확인까지는 채 20초가 걸리지 않았다.
캄보디아 정부는 바콩을 통해 자국 화폐인 리엘 유통량을 높이고자 한다. 캄보디아 법정통화는 리엘화이지만 실제로 달러화가 주로 통용된다. 마트와 식당에서 달러화로 계산이 되고 잔돈을 리엘화로 받는 방식이 빈번하다. 지난해 기준 캄보디아 예금 중 단 8.6%만이 리엘화로 된 예금인 반면 달러화는 전체 화폐 유통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바콩을 통해 계좌 개설이 늘어나면 리엘화 사용 역시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 실제 2020년 바콩 출시 이후 은행 예금액은 증가했다. 이듬해 캄보디아 예금액은 전년 대비 15.4% 증가한 385억 달러를 기록했다.
NBC는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을 바탕으로 바콩을 활성화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 캄보디아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129%에 달한다. 지난해 NBC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바콩 사용자는 약 79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49.38%이다. 이체 건수는 달러화 거래가 450건, 리엘화 거래가 120건으로 총 570만 건을 달성했다.
캄보디아 은행권 관계자는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바콩의 안전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며 “개인정보 보호 인식이 약한 캄보디아에서 바콩은 안전한 금융시스템으로 인식되는 만큼 바콩을 통한 QR페이 시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역시 QR 코드를 통한 전자결제가 발달한 시장이다. 정부 주도의 디지털 화폐를 도입한 캄보디아와 달리 핀테크 업체가 전자지갑(e-Wallet) 시장을 개화시켰다. 현지에서는 코로나19 이후 모모(MoMo), VN페이, 잘로페이, 모카 등이 40여개 전자지갑 업체가 각종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비현금 결제를 확대했다.
이들 업체는 결제 시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프로모션을 통해 스마트폰 사용이 익숙한 10~30대를 전자지갑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수천만의 고객 수를 확보한 플랫폼이다 보니 전통 금융사가 전자지갑업체와의 협업을 구애하고 있다.
럼 황 남씨는 “모모와 VN페이는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결제 플랫폼”이라며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고, 현금보다는 QR 코드 등으로 결제되는 전자지갑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결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현지 은행 관계자는 “선불 충전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벅스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며 “전자지갑업체별로 결제할 때 할인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10대 학생부터 30대 직장인까지 전자지갑결제를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베트남 전자지갑업체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3000만명이 넘는 고객을 확보하며 굳건히 현지 1위 전자지갑업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모조차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모는 전자지갑시장 점유율 53%를 기록하고 있지만, 지난해 말 누적 적자는 3조6000억동(약 1944억원)에 달했다. 고객 대부분이 여러 전자지갑 앱을 설치한 뒤 더 큰 할인 혜택이 있는 서비스를 선택한다. 아무리 많은 고객 수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프로모션이 종료하는 즉시 고객 이탈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결국 현지 전자지갑업체들은 적자가 나더라도 프로모션을 멈출 수 없는 구조가 됐다. 이에 따라 전자지갑업체들은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으로 치면 카카오뱅크와 같은 인터넷은행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또 다른 현지 은행 관계자는 “적자가 나도 할인 혜택을 지원하지 않으면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게 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혜택을 제공하는 곳이 많다”며 “한국에서도 초창기 빅테크 업체들이 적자가 나도 버티기에 들어갔던 것처럼 규모가 큰 전자지갑업체들은 해외 투자자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유치해 다른 업체들이 적자를 버티지 못하고 폐업할 때까지 기다리는 구조”라고 했다.
정유신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은 “동남아의 경우 외부적으로는 중국의 알리페이 등으로 QR코드 결제 플랫폼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며 “내부적으로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비교적 기존 금융권들의 이해관계가 약해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저항이 적어, 모바일 금융 분야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 원장은 “이런 토대를 바탕으로 향후 동남아는 모바일 금융 발전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