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라구나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는 벤처캐피털(VC) 업계의 ‘스타’ 심사역이다. 한국투자파트너스에서 심사역으로 근무하던 2011년 카카오에 초기 투자해 천문학적인 수익을 낸 것으로 잘 알려졌다. 당시 카카오의 기업 가치는 2200억원에 불과했다. 현재 시가총액(57조원)의 0.4%에 불과한 몸값이다.
박 대표는 카카오 외에도 ‘검은사막’ 개발사 펄어비스, 카카오게임즈, 더블유게임즈 등 게임 업체들과 카카오모빌리티에 인수된 내비게이션 개발사 록앤올 등에 초기 투자하며 심사역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후 게임 업체 네시삼십삼분 CEO로 영입됐으며, 조이시티의 CEO를 거쳐 2018년 말 라구나인베스트를 창업해 다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돌아왔다.
창업한 지 3년도 안 돼 14개의 벤처 펀드를 만들어 1500억원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박 대표는 요즘 콘텐츠 투자에 푹 빠져있다.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의 사외이사로도 활동 중인 그는 이른바 K-콘텐츠의 전성기가 향후 10년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왜 콘텐츠 투자에 주력하고 있는지.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더 많은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시대다. 인공지능(AI)과 로봇이 발달하며 인간의 노동이 점점 불필요해지고 있다. 그러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하겠나. 콘텐츠를 소비하며 놀 수밖에 없다.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하면 자동차 안에서도 게임을 하고 드라마를 보는 등 콘텐츠를 소비할 것이다. 또 다양한 기기가 발전하며 여러 공간에서 콘텐츠를 즐기는 것도 가능해졌다. 즉, 콘텐츠의 ‘시공간’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콘텐츠 제작사들의 기업 가치가 천정부지로 솟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
“콘텐츠 자체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을 뿐 아니라, 플랫폼 업체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플랫폼이 콘텐츠 시장을 독과점할 때는 콘텐츠 사업자(CP)가 플랫폼에 종속될 수밖에 없지만, 반대로 플랫폼 사업자가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지면 CP의 힘이 강해진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경쟁으로 인해 웹툰 제작사 같은 CP들의 몸값이 치솟고 있으며,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의 경쟁으로 드라마·영화 제작사의 기업가치가 오르고 있다. CJ ENM이 SM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하려고 추진 중인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에는 특히 한국 콘텐츠가 골고루 주목 받고 있다. BTS가 한국 콘텐츠의 열풍을 주도했다고 봐야 할까.
“우리나라는 원래 콘텐츠의 ‘변방국’이었는데, 언제부턴가 한국이 만들면 힙하고(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개성이 강하다는 뜻의 신조어) 쿨하게 받아들이는 시대가 됐다. 웹툰, 온라인 게임에서는 거의 종주국이나 다름 없고 이제는 영화와 드라마, 하다 못해 한국관광공사에서 만든 광고 영상까지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정도다. BTS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봐야 한다.
좋은 콘텐츠가 나오려면 경제 발전이 동반되고 민주화가 이뤄져 문화적 다양성이 보장돼야만 한다. 그런데 아시아권에서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뿐이지 않나. 일본의 경우 과거 콘텐츠 시장에서 한국의 위치에 있었지만, 20년 간 일당 독재와 경기 침체 등이 계속되며 콘텐츠의 발전이 멈추다시피 했다. 한국 콘텐츠의 ‘대세’는 앞으로 10년은 지속될 것 같다.”
현재 하이브 사외이사로도 재직 중인데, 회사 관계자로서 볼 때 하이브가 다른 연예 기획사들보다 잘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JYP나 YG 같은 기존 연예 기획사들과 달리, 하이브는 IT 인터넷 기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경영진부터 여타 기획사들과 다르다. 박지원 하이브 대표는 과거 넥슨 코리아의 CEO였고, 가장 중요한 레이블인 빅히트뮤직을 이끌고 있는 신영재 대표 역시 넥슨에서 피파온라인 사업 실장으로 일했었다. 게임 사업을 하던 경영진이 지금 BTS의 소속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사외이사로 일하고 있는 나 역시 IT와 게임 산업에 주로 투자했고, 게임 업체 CEO 출신이지 않나(관련 업계에 따르면,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은 새로운 경영진을 뽑을 때 ‘연예 기획사 출신은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건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IT 인터넷 기업에 가까운 정체성을 갖고 있다 보니, 하이브는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타격을 덜 받았다. 보통 엔터테인먼트 업체들은 매출액의 최대 80~90%가 콘서트와 음반에서 나오는데, 코로나 때문에 공연을 못하다 보니 매출이 급감한 회사들이 많다. 하이브는 콘서트 매출 비중이 높지 않고 위버스 등 온라인 사업을 잘하고 있다. 국내에서 온라인 사업의 유료화를 가장 잘하는 회사가 바로 온라인 게임 업체다. 하이브에 게임 업계의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이브 같은 연예 기획사에 직접 투자한 경험도 있는지.
“우리 회사에서 지난 2019년 초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에 투자했다. 소속 가수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이 이른바 역주행(주목 받지 못했던 곡이 재조명돼 음원 차트에서 높은 순위에 오르는 것)에 성공하기 전이었다. 그때는 브레이브걸스가 그 정도로 성공할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다만, 프로듀서 용감한형제가 많은 음원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워낙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양질의 음원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투자한 것이다.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는 내년 중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최근에는 블루닷엔터테인먼트에 투자했다. 6월에 데뷔한 보이그룹 ‘저스트비’의 소속사다. 저스트비는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 그룹인데 하이브 위버스에 입점했다. 위버스가 하이브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신생 그룹을 입점시키는 것은 거의 없는 사례다. 저스트비는 오디션을 통해 데뷔해 인지도가 높고 팬층이 탄탄하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 외에 어떤 콘텐츠에 주목하고 있나.
“미디어 믹스(media mix) 전략을 잘 구사할 수 있는 콘텐츠 기업들을 눈여겨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에서 지난해 4월 투자한 마코빌이라는 회사가 있는데, 대표이사가 과거 스마트스터디에서 ‘상어가족’으로 유명한 핑크퐁을 만든 부사장이었다. 핑크퐁 캐릭터들을 그린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마코빌은 지금 ‘치타부’라는 캐릭터로 콘텐츠 사업을 하고 있는데, 유튜브 애니메이션은 물론 웹툰과 게임, 장편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 다양한 미디어에 노출하는 것을 지향한다. 지적재산권(IP)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광고를 많이 하든가 여러 미디어에 노출해 대중에게 익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마코빌은 후자를 택한 것이다.”
과거에는 주로 펄어비스, 액션스퀘어, 네시삼십삼분 같은 게임 업체에 투자하지 않았나. 요즘도 게임에 투자하고 있는지.
“라구나인베스트먼트에서 운용하는 자산 1500억원 중 약 30%를 콘텐츠에 투자하고 있는데, 게임도 그 안에 포함된다. 지금 게임 시장이 모바일 게임에 많이 집중돼있어, 나는 PC나 콘솔 게임 개발사들을 관심 갖고 살펴보고 있다.
과거에는 콘솔 게임을 개발하려면 하드웨어를 직접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스타트업이 시도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스타트업의 콘솔 게임 개발과 출시를 돕는 플랫폼이 있어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 대표적으로 2019년 부산의 콘솔 게임 개발사 넥스트스테이지에 투자했다. 젊은 창업가 네 명이 의기투합해 창업한 소규모 게임 개발사로, 언리얼 엔진(3차원 게임 엔진)을 매우 잘 다룬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 투자한 게이머 커뮤니티 오피지지가 있다. 글로벌 게임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통계 사이트에서 시작해 올해 초 일간 활성 이용자 수(DAU)가 7000만명을 넘은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네시삼십삼분에 있을 때 최초의 투자자로 참여했고, 라구나인베스트먼트를 창업한 후 다시 투자했다.”
얼마 전 일부 게임 업체가 지나친 과금 모델을 적용해 사용자들에게 외면 받은 사례가 있었다. 앞으로 국내 게임 업체들의 과금 모델은 어떤 방향으로 개선돼야 할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모델은 소수의 이용자에게 많은 돈을 과금하는 방식이다. 소수의 유저가 수천만원에서 수억 원을 지불하고, 나머지 90%의 이용자들은 무료로 게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과금 모델은 바뀔 필요가 있다. 1%가 수억 원을 지불하는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이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까지만 지불하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러면 게임 개발사 입장에서는 수익을 그대로 유지하며 더 많은 이용자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과금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면 결국 하드코어 이용자들만 남게 된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하드코어 이용자들은 게임에 자동차 한 대 값을 지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서양에서는 그런 식의 소비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는 문화가 강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메타버스(가상 세계) 테마가 각광 받고 있는데, 관련 업체에도 투자했는지.
“유티플러스인터랙티브에 2년 전, 그리고 올해 한 번 씩 투자했다. 유티플러스에서 운영하는 메타버스 플랫폼 ‘디토랜드’는 올해 인디크래프트 게임쇼를 진행했고, ‘신서유기’나 ‘슬기로운 의사생활’ 같은 CJ ENM 콘텐츠를 디토랜드 안에서 즐길 수 있다.
요즘은 메타버스 사업을 하겠다는 회사들이 매우 많은데, 3D그래픽 외주 업체나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콘텐츠 업체들이 메타버스 기업으로 포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메타버스 사업을 하더라도 아직 기획 단계에 머물고 있는 회사가 많다. 국내에서 메타버스를 제대로 구현해내 상업적으로 잘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네이버 손자회사 제페토와 유티플러스 뿐이라고 생각한다.”
전세계적으로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이 진행되면 결국 스타트업 투자 생태계도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 스타트업들의 몸값이 내려갈 조짐이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VC에는 오히려 호재가 될 것이다. 지금보다 낮은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주가 수준)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 하고 나서 일시적으로 증시가 침체해 밸류에이션이 낮아진다고 해도, VC는 장기 투자를 하기 때문에 5년 후 회수할 때는 결국 몸값이 다시 오를 수밖에 없다.”
VC들은 앞으로 어떤 방식의 투자를 지향해야 할까.
“유행을 타는 회사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회사에 투자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VC들이 대체로 클럽딜(다수의 투자자가 한 기업에 동시에 투자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꼭 여럿이 같이 투자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산업이 뜰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주니어 심사역이라면, 보다 다양한 곳에 투자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