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인 ‘노심용융’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기술이 나왔다. 기다란 봉 형태인 기존 핵연료를 당구공 크기로 나눠 쓰는 ‘페블베드’ 원전 기술이다. 그동안 페블베드 원자로는 이론으로만 안전성을 확인했는데, 중국 연구진이 실제 원자로에서 시연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25일(현지 시각) 미국 원자력학회는 중국 원자력·신에너지기술 연구소 연구진이 노심용융을 원천 차단하는 페블베드 원자로의 안전성을 세계 최초로 시연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중국 연구진의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쥴’에 실렸다.
노심용융은 원전의 핵연료가 있는 노심이 녹아내려 방사성 물질이 원자로 밖으로 누출되는 현상이다. 노심은 원자로 맨 안쪽에서 핵연료가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는 곳이다. 원전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때는 냉각재로 열을 식혀 문제가 없지만, 옛소련의 체르노빌 원전과 일본 후쿠시마 원전처럼 냉각재가 공급되지 않는 사고가 발생하면 노심용융이 일어나 피해를 키웠다.
페블베드 원자로가 노심용융에서 자유로운 것은 연료 밀도를 낮춘 덕분이다. 기존 원전이 핵연료를 기다란 봉 형태로 만들고 이들을 다발로 묶어 사용한다면, 페블베드 방식은 그보다 작은 당구공 크기의 핵연료인 페블 수십 만개를 사용한다. 핵연료뵹 다발은 원자로가 멈춰도 계속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 제대로 냉각하지 않으면 노심용융을 일으킨다. 반면 페블은 연료 밀도가 낮아 원자로가 멈추면 핵분열 반응도 중단된다. 덕분에 온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오르지 않아 노심용융이 원천 차단된다. 표면도 흑연으로 코팅해 핵분열 속도를 조절한다.
연구진은 중국 산둥성에 있는 200㎿(메가와트)급 고온가스냉각로(HTGR)에서 페블베드 기술이 사고 상황에서도 핵분열 반응을 멈출 수 있는지 확인했다. 페블베드 기술은 1940년대 처음 개념이 제시됐으나 안전성에 대해서는 이론 연구만 이뤄졌을 뿐, 실제 원전에서 실험이 이뤄진 적은 없다.
실험은 지난해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원전을 정상 작동하다가 갑작스럽게 전원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비상 상황에서 노심을 냉각하는 비상 코어 냉각 시스템도 꺼둔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핵분열 반응이 멈추며 온도가 내려가는지 확인했다.
실험 결과, 노심 내부의 증기 온도는 원전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때 섭씨 520도로 유지되다가 전력 차단 후 870도까지 올랐다. 이후에는 점차 하락하기 시작해 전원를 차단한 지 35시간이 지난 뒤에는 완전히 냉각되며 노심용융 현상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실제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해 전원이 차단되더라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대형 재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결과다.
연구진은 “페블베드 기술이 본질적으로 안전하다는 증거”라며 “앞으로 페블베드 원전의 안전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페블베드 원전은 최근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과 함께 미국, 독일이 기술 개발을 선도하고 있다. 미국의 원전 기업인 엑스에너지(X-Energy)는 80㎿급 페블베드 원전 ‘Xe-100′을 개발해 규제 당국의 건설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중국과 독일은 이미 소형 시험로를 짓고 기술 확보에 나섰다.
한국도 페블베드처럼 안전성이 높은 차세대 원자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소듐냉각고속로, 고온가스로, 용융염원자로, 히트파이프 원자로 등 4개 기술에 투자해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참고 자료
Joule(2024), DOI: https://doi.org/10.1016/j.joule.2024.06.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