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로템(064350)이 우주 발사체 개발 사업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2년 우주 발사체 개발 사업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면서 현대정공(현재 현대모비스)에 개발팀이 꾸려진 지 30여년 만이다.
26일 항공우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대로템은 최근 우주 발사체 사업에 다시 뛰어들기 위해 내부적으로 검토를 진행 중이다. 우주 발사체에 쓰이는 메탄엔진 개발을 시작으로 발사체 제작까지 우주 사업 전반을 확대하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한 항공우주 업계 관계자는 “현대로템 내부적으로 논의가 상당히 진척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현대로템 측은 아직 신중한 입장이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공식 입장을 묻는 조선비즈의 문의에 “메탄엔진은 1990년대부터 현대로템이 최초로 했던 사업이기 때문에 앞으로 좀 더 고도화를 준비하고 있다”며 “발사체는 사업부에서 검토하고 있지만 아직 정해진 건 없다”고 말했다.
◇한화·KAI 전에 현대가 있었다
지난 5월 한국형발사체인 누리호의 첫 실전 발사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한국도 실용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발사체를 보유한 국가가 됐다. 윤석열 정부 들어 미래 우주경제 로드맵이 발표되고, 민간이 우주 개발을 주도하는 ‘뉴스페이스’가 본격화되면서 산업계도 우주를 미래 먹을거리로 보고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누리호의 체계종합기업으로 선정돼 기술 이전을 받고 있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나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국내 우주 산업의 대표적인 기업이다. 이외에도 여러 스타트업이 발사체 제작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항공우주 업계에서는 우주 발사체를 이야기할 때 ‘현대’라는 이름이 한화나 KAI보다 먼저 나온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지시로 현대정공은 1992년 일찌감치 로켓(발사체)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김동진 현대정공 기술연구소장이 개발을 이끌었고, 30여명에 가까운 팀이 꾸려졌다.
경기도 용인의 마북연구소가 현대의 로켓 개발 최전선이었다. 러시아에서 로켓엔진을 사왔고 러시아 현지 기술자들도 초빙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현대정공 연구자들이 힘을 모아 발사체 기술을 개발했다. 당시 현대정공에서 로켓 개발을 맡다 항우연으로 자리를 옮긴 임하영 항우연 책임연구원은 “1994년 정도부터 러시아에서 기술을 도입해서 로켓까지 개발을 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며 “1997년 정도에 서산에 시험장을 짓고 본격적으로 메탄엔진 개발에 나섰는데 2000년대 들어서 현대자동차그룹 차원의 방향과 맞지 않으면서 우주 사업을 접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현대정공에서 로켓 개발에 참여했던 이들은 사업을 중도에 접지 않고 꾸준히 이어갔다면 지금쯤 한국이 로켓 엔진 분야의 기술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을 수도 있다고 아쉬워한다. 당시 현대정공이 개발하던 로켓 엔진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메탄엔진이기 때문이다.
누리호를 비롯해서 그동안 우주 발사체 연료는 케로신(등유)을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케로신은 상온에서 액체로 존재하고 휘발성도 낮아서 다루기가 쉽다. 대신 연소 과정에서 다량의 찌꺼끼가 발생하면서 엔진 내부에 묻기 때문에 케로신을 이용한 로켓 엔진은 재사용이 어렵다. 반면 메탄을 이용하면 찌꺼기가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로켓 엔진을 재사용할 수 있다.
최근 스페이스X가 발사체 재사용 기술을 개발하면서 메탄 엔진이 각광받는 이유다. 스페이스X가 심우주 탐사를 위해 만들고 있는 발사체인 ‘스타십’이나 블루오리진의 ‘뉴글렌’ 같은 차세대 발사체는 모두 액체 메탄 엔진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개발 중이다. 얼마 전에는 중국의 민간 우주기업인 랜드스페이스가 세계 최초로 액체 메탄 로켓 발사에 성공하기도 했다.
한국은 메탄 엔진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탓에 케로신을 고집하고 있다. 2032년 달 착륙을 목표로 개발에 착수한 차세대발사체도 케로신을 연료로 쓰기로 했다. 항우연 관계자는 “케로신 엔진의 재사용이 어려운 게 찌꺼기 때문인데 케로신에 함유된 황 성분 때문”이라며 “황 성분을 제거한 케로신을 연료로 쓰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대정공은 30년이나 앞서서 메탄 엔진을 이용한 발사체를 개발했던 셈이다. 당시 현대정공에서 메탄 엔진 개발을 맡았던 김경호씨는 “당시 케로신과 수소 엔진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는데 케로신은 재사용이 어려운 대신 개발 기술 자료가 오픈된 것들이 많아서 후발 주자 입장에서 따라가기 좋았고, 수소엔진을 메탄으로 바꾸는 건 접근성이 낮은 대신 러시아 켈디시 연구소에서 관련된 연구를 많이 해서 생각보다 쉽게 바꿀 수 있었다”며 “향후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둔다면 상대적으로 싸고 재사용이 가능한 메탄 엔진이 낫겠다는 판단을 하고 메탄 엔진을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메탄 엔진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200회가 넘는 실험을 진행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나로호(KSLV-1)에 메탄 엔진을 쓰자고 제안했지만 결국 무산됐다”며 “이후 여러 이유로 우주 사업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현대가 결국 우주 사업에서 발을 빼게 됐다”고 말했다. 2004년 현대정공이 우주 사업을 정리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현대정공에서 우주 개발을 맡고 있던 인력은 회사를 나가거나 연료전지나 자동차용 모터를 개발하는 업무로 재배치됐다.
김씨는 함께 일하던 개발자들과 함께 현대를 나와 씨앤스페이스라는 엔진개발 기업을 차렸다. 씨앤스페이스는 2008년에 재사용이 가능한 메탄엔진을 개발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시장의 관심을 받지 못하며 결국 사업을 정리했다. 김씨는 “현대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힘도 있기 때문에 그때 메탄 엔진을 개발했다면 많은 관심을 받고 수주로도 이어졌을 수 있다”며 “한국이 메탄 엔진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국의 여러 우주 업체들이 한국과 협력할 때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책임연구원도 “30년 전에 현대가 러시아 켈디시 연구소에서 기술을 도입했던 건데 당시 똑같은 기술을 이탈리아의 아비오라는 회사가 도입했다. 그런데 아비오는 꾸준히 우주 로켓 개발에 나섰고 지금은 유럽의 우주발사체인 베가 로켓을 만드는 회사가 됐다”며 “요즘 우주 발사체 기업들이 메탄 엔진 관련해서 하고 있는 연구개발을 현대는 이미 그때 다 했다. 계속해서 로켓 개발을 했다면 지금쯤 메탄 엔진 개발 기술은 우리가 한참 앞서 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우주 사업 다시 주목하는 현대차그룹
현대정공이 현대모비스로 이름을 바꿔달고 현대차그룹은 한동안 우주 사업에 거리를 뒀다. 다만 현대로템이 나로호와 누리호 개발 사업에 꾸준히 참여했다. 지난 5월 첫 실전 발사에 성공한 누리호 개발 사업에도 현대로템은 다양한 역할을 했다.
현대로템이 누리호 개발 사업에서 맡은 일은 추진기관시스템 시험설비와 추진공급계 시험설비 구축이다. 추진기관시스템 시험설비는 쉽게 말해 누리호의 엔진 성능을 시험하는 설비를 말한다. 누리호는 1단과 2단, 3단에 각각 엔진이 들어간다. 1단에는 75t급 액체엔진 4기, 2단에는 75t급 액체엔진 1기, 3단에는 7t급 액체엔진 1기가 들어간다. 각각의 엔진에 대한 시험을 통해 성능을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
대전 항우연 본원에 설치된 추진공급계 시험설비 역시 현대로템이 구축했다. 실제 발사체 운영조건과 같은 고압·초저온 상태를 만들어서 발사체에 들어가는 부품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는 설비다.
이미 누리호 개발 사업에서 다양한 경험을 확보했기 때문에 현대로템이 다시 메탄 엔진과 발사체 개발 사업에 뛰어들어도 승산이 충분하다는 게 항공우주 업계의 시각이다. 한 항공우주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아닌 세계 발사체 시장을 겨냥해서 사업을 준비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며 “메탄엔진은 이미 경험이 충분하기 때문에 작은 규모의 엔진은 2년 정도면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메탄 엔진 개발에 열린 자세를 보이는 것도 긍정적인 신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1일 국내 발사체 개발 업체들을 모아 발사체 산업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이 자리에는 현대로템 외에도 한화, KAI, 스타트업 등 국내에서 발사체 사업을 준비하는 여러 기업이 참석했다. 메탄 엔진 기술 개발도 회의 안건에 올랐다. 이준배 과기정통부 거대공공연구정책과장은 “앞으로 민간이 주도하는 우주 시대에는 재사용 기술이나 메탄 엔진 같은 기술을 통해 경쟁력과 경제성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며 “올해 말까지 우주산업 육성을 위한 전략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역시 최근 우주 사업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6월 28일 달 탐사 모빌리티 개발을 위한 인력 채용 공고를 내기도 했다. 새로 뽑은 개발 인력에 기존 남양연구소 인력을 합쳐 전담 조직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지난해 7월에는 한국천문연구원(KASI) 등과 달 탐사를 위한 다자간 공동연구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2027년까지 무게 70㎏ 탐사 장비를 운반할 수 있는 로버를 개발하는 게 목표다. 현대차그룹이 우주발사체 사업 참여로 국내 발사체 개발 기업은 모두 7개로 늘어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