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 중구 광화문 거리에서 광주과학기술원 김건우 학부장(왼쪽부터),강진호 교수, 안강훈 교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이태경 기자

인공지능(AI)이 글을 쓰고, 코딩을 하고, 보고서까지 대신 만드는 시대가 됐다. 답을 찾는 능력의 상당 부분은 기계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런 때일수록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말도 나오지만, 빅테크가 철학자를 채용하고, 철학 전공 CEO가 주목받는 것은 소수 사례다.

그런 와중에 미래 과학기술 인재를 키우는 광주과학기술원(GIST)이 올해 철학 전공 교수를 1명에서 3명으로 늘렸다. 문과대가 아닌 과학기술원에서 철학 교육을 강화한 것이어서 이례적이다. GIST 인문사회과학부 김건우 학부장 주도로 하버드 출신 철학자인 강진호 교수, 안강훈 교수를 영입했다. 철학은 AI 시대 과기원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지난 8일 서울 중구 광화문에서 3명의 철학자를 만나 물어봤다.

◇"잘 쓰면 AI가 조수, 못 쓰면 AI의 노예"

강 교수는 AI 시대에 가장 필요한 역량으로 "읽고 쓰는 능력과 질문하는 힘"을 꼽았다. 철학 교육으로 길러낼 수 있는 역량이라는 것이다. 그는 "AI가 여러 단어와 문장을 제안해도 어떤 표현과 구성이 가장 좋은지 판단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라며 "역량에 따라 AI를 조수로 쓸 수도 있고, 자신이 AI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강 교수는 "이공계 학생들은 주어진 문제를 푸는 데는 뛰어나지만, 왜 이게 문제인지는 잘 묻지 않는다"고도 했다. 학생은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찾으면 되지만, 연구자는 문제 자체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강의에서 일부러 AI를 쓰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 시험은 오픈북이지만 학생들은 스마트폰 대신 A4 용지 한 장만 들고 들어갈 수 있다. 무엇을 골라 적고, 어떻게 정리할지를 보겠다는 것이다. 학기 중에는 짧은 요약·비판문을 여러 차례 내게 한다. 단, AI는 쓰지 못하게 한다. 강 교수는 "한 학기 동안 AI 없이 자기 힘으로 읽고 쓰는 경험은 이제 오히려 중요한 훈련이 됐다"고 했다.

◇"철학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

안강훈 교수는 "우리 사회는 지식 중심의 경쟁 사회"라며 "누가 더 빨리 만들고 처리하느냐로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니 AI가 인간보다 더 잘하면 어쩌냐는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다. 장자(莊子)의 일화도 꺼내며 "신기술에 대한 두려움은 수천 년 전에도 존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 교수는 "철학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을 묻는 학문"이라며 "우리한테 정말 중요한 가치들이 뭔지 고민할 기회를 준다"고 했다. 그는 "효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가치도 헤아려야 AI가 주는 충격을 긍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AI가 바꾸는 학문의 운영 체제

김건우 학부장은 AI를 단순한 기술이나 새로운 분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AI가 물리학·화학·생물학·공학은 물론 인문사회 분야까지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AI는 여러 분과 중 하나인 동시에 기존 분과를 바꾸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했다. 2024년 노벨 물리학상이 AI 연구자에게 돌아간 것도 과학이라는 분야의 의미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봤다.

이런 변화 속에서는 한 분야 지식만으로 AI 시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기술적 이해에 인문학적 고민도 가미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GIST가 기존 학제 구분을 넘어 통합적 연구 환경을 제공할 '초학제 AI 연구센터'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세 교수의 말을 종합하면 AI 시대 철학은 장식적 교양이 아니라 기초 체력에 가깝다. 과거 교육이 정해진 답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고시 공부' 방식에 가까웠다면, AI 시대에는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묻고 정의하는 '문제 중심' 교육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이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격차는 답을 외우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서 벌어진다. 강 교수는 "거대언어모델(LLM)을 직접 써봐도 내가 좋은 질문을 하면 답변도 좋아지지만, 질문이 안 좋으면 답도 안 좋아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