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첫 출근 감상]
1. 긴급하게 연구비 상황을 핵심 팀원들에게 알림
2. 모두가 말이 없음
3.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4-5 개월은 집중해서 일하고, 여름/ 겨울에는 정리하고 논문쓰는 시간으로 돌리기로 함. 코로나 판데믹 때 오히려 논문이 더 나왔었다며 이렇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고 함
4. 가능하면 돈 드는 실험을 자제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방법을 고려하라고 함. 특히, 젊은 학생들이 이 기회에 Bioinformatics를 배우고 활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함
5. 최대한 값싸게 구매하고, 재고 관리도 철저하게 하기로 함. 단, 이 모든 조율은 결국 효율을 높이기보다는 잡일만 늘리고 연구원을 지치게하여 생산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농후함
6. 원래는 회사에서 파는 걸 사서 바로 투입하여 실험을 진행하여야 하지만, 극단적으로 연구비가 부족한 상황이라 필요한 성장인자와 시약을 홈메이드로 생산하여 사용하기로 함. 잘하면 선진국형 연구소같은 단백질 팀이 될 수도 있지만, 20년 전으로 회기하는 방향일 수도 있음
7. 단장이 직접 관리하는 예비비를 따로 챙기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조금씩 지원해주기로 함. 10년전 첫 랩 꾸릴 때 그 느낌으로 돌아감
8. 단장팀에 결원이 생길 예정이라 충원을 급하게 해야하는데, 돈이 부족함
9. 열두척도 멘탈도 안남아 있음

지난 1월 3일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 교정 연구단장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글이다. 정부가 수월성과 국제화를 내세워 단행한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토로하는 글이었다. 구 단장은 이 글을 올리기 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정부가 단행한 R&D 예산 삭감과 제도 개편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

구 단장이 “사막에서 생수 반병 나눠 마시는 상황”이라는 글을 올린 날, 공교롭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세계 최고·최초에 도전하는 혁신적인 R&D로 새롭게 도약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내며 올해 기초연구사업 시행계획을 발표했다.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 단장./IBS

지난해 말 국회에서 통과된 올해 R&D 예산은 작년과 비교해 4조6000억원 삭감된 26조5000억원이다. 당초 지난해 대비 5조2000억원 삭감된 25조9000억원 규모의 정부안에서 6000억원 가량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한국의 R&D 예산이 줄어든 것은 33년 만에 처음이다. 세계 최고·최초에 도전하겠다는 과기정통부의 포부와 생수 반병 남았다는 구 단장의 인식 사이의 괴리는 생각보다 커 보였다.

구 단장은 정부가 제시한 수월성과 국제화라는 키워드에서 이보다 더 적합한 사례를 찾기 힘든 연구자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김진수 전 서울대 교수에 이어 작년부터 IBS 유전체 교정 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구 단장은 40대의 젊은 나이에 오가노이드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은 모자이크 유전학이라는 본인만의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구 단장은 포스텍에서 생물학으로 학사와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와 네덜란드 후브레흐트 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대 줄기세포연구소 그룹리더를 거쳐, 2017년 세계적인 연구소인 오스트리아 분자생명공학연구소(IMBA)의 그룹리더를 맡았다. 임바연구소에서 계속 근무했어도 세계적인 과학자로 성장했겠지만, 한국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2021년 돌아왔다. 구 단장은 제12회 생명의 신비상 장려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장 등을 수상했으며, 2022년과 2023년에는 글로벌 학술정보업체 클래리베이트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HCR‧Highly Cited Researcher)’로 2년 연속 꼽혔다. 클래리베이트는 매년 논문 피인용 횟수 상위 1% 같은 지표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입증한 연구자를 HCR로 선정하고 있다.

정부의 설명대로라면 구 단장 같은 연구자는 이번 R&D 제도 개편을 반겨야 할 일이다. 그런데 구 단장은 어째서 연일 소셜미디어에 장탄식에 가까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구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구 단장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구 단장은 “IBS의 거의 모든 연구단에 예산 삭감이 이뤄졌다”며 “우리처럼 국제 교류를 해야 하는 연구단 입장에서는 어려움이 크다. 우리는 인건비 비중이 크기 때문에 이번 예산 삭감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단 예산 삭감으로 정상적인 수준으로 연구를 이어 나가기 어렵다”며 “해외 인턴과 국제 교류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구 단장은 지난 2021년 IBS에 자리잡은 뒤 2년 동안 꾸준히 해외 인턴 학생을 모집해 왔다. 외국의 우수한 학생들을 국내로 데려올 적절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에 만족한 인도나 유럽의 교수들이 학생을 더 보내주겠다고도 했지만 더 이상 우수한 학생을 데려오긴 어려워졌다. 올해 연구단 내의 해외 인턴 학생 7명을 유지하는 데 드는 1억~2억원도 예산 삭감으로 큰 부담이 됐다.

올해부터 시작하기로 한 오스트리아 빈 분자생명공학연구소(IMBA)와의 인적 교류 프로그램도 차질을 빚게 됐다. 해당 프로그램은 IBS 소속 학생 연구원들이 한국과 오스트리아에서 각각 2년씩 연구를 하며 외국에서도 박사후연구원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돕는다. 경력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는 국내 인재들을 잡아보고자 만들었으나, 필요한 연간 예산을 마련하기 어려워 무기한 중단하기로 했다. 구 단장은 “양측이 협의를 해서 계약을 맺은 건데 이 사업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며 “IBS에 상황을 전달했지만 전체 예산이 삭감돼 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과기정통부는 이번 R&D 제도 개편으로 해외 우수 연구소와의 인력 교류를 늘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예산 삭감으로 기존에 있던 인력 교류 사업이 중단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실험에 필요한 예산도 부족해 1년 내내 연구를 이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구 단장은 털어놨다. 구 단장은 “오래 연구를 해온 IBS 연구단은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외엔 유전체 교정 연구단과 상황이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께서 수월성을 높이고 국제화를 통해 퍼스트 무버가 돼라는 좋은 말씀을 주셨는데, 국내에서 그런 곳 중에 하나가 클래리베이트 선정 HCR이 이끄는 IBS의 연구단”이라며 “그런데 연구단이 출범하고 첫 해만에 예산을 삭감하니 어렵다. 게다가 연구단 중간평가를 2026년에 한다는데 죽으라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고 말했다.

구 단장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한국 과학자로서 고국에 크게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처음부터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며 “앞으로 보여드려야 할 것들이 많은데 기회조차 박탈된 것 같다. 여기서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가기를 여기저기서 기대하는 느낌마저 든다”고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