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R&D 예산안은 전년대비 16.6% 삭감된 25조9000억원이다. R&D 예산이 정부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에서 3.9%로 줄었다. 33년 만의 예산 감축에 과학기술계가 큰 혼란에 빠졌지만, 수십 조원에 달하는 방대한 예산안 앞에서 정작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한 예산이 삭감됐고, 이 와중에 어떤 예산은 왜 늘었는지 제대로 아는 국민은 없다. 조선비즈는 국회 예산안 심의 시즌을 맞아 내년도 R&D 예산안에서 꼭 필요한 예산이 삭감된 건 어떤 부분인지, 늘어난 예산 중에 낭비성 예산은 없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지난 27일 윤석열 대통령은 ‘과학입국’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실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민간위원들과 오찬간담회를 하며 “과학입국을 위해 다함께 노력해달라”고 말했다.
과학입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6년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전신인 과학기술처를 설립하며 친필로 쓴 ‘과학입국 기술자립(科學立國 技術自立)’에 처음 등장한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과학기술계가 지금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과학기술 강국의 초석을 닦은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는 이유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과학입국’에는 과학기술계의 평가가 박하다. 주무부처는 물론 대통령까지 나서 과학기술계 달래기에 나섰지만 처음부터 과기계 의견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단행한 R&D 예산 삭감의 후폭풍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국회에서 내년도 R&D 예산안을 놓고 옥신각신하면서 정작 내년 연구계획을 짜야 하는 현장의 연구자들의 마음만 급하다.
이런 분위기는 27일 윤 대통령이 주재한 오찬간담회 자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통령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민간위원들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의 식사자리로 기획됐지만 오고간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냥 편한 자리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대통령과 점심을 함께 한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서울대 석좌교수)은 현재 R&D 시스템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며 개선을 건의했다. 현 단장은 과학기술분야 예비타당성조사를 대폭 면제해달라는 내용과 기초연구의 회계연도 일치 규정을 없애고 연중 과제를 상시 시작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이영국 한국화학연구원장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을 기타 공공기관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다. 2007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 이래 출연연은 인력 운영, 예산 집행 등에서 다른 공공기관과 함께 획일화된 기준으로 관리돼 연구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했다. 2018년에 출연연을 ‘연구목적기관’으로 별도 지정해 관리하도록 하는 ‘연구목적기관 지정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다른 부처 산하 기관과 형평성 문제를 이유로 아직까지 공공기관 해제를 하지 못하고 있다. 김준범 울산대 교수는 과학기술 분야에 더 많은 예산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부처에 할당되는 예산의 일부를 부처 구분 없이 과학기술 분야에 투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제안했다.
이날 국회에서는 내년도 R&D 예산안 확정을 위한 마지막 관문에 돌입하고 있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는 27일부터 예결위원장과 예결위 양당 간사만 참여하는 소소위(예산소위 내 소위원회)를 가동했다. 예결위는 지난 13일부터 9일 동안 예산소위를 열고 정부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 656억9000억원에 대한 감액과 증액 심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여야 이견이 너무 커서 제대로 된 심사를 하지도 못했다. 가장 이견이 컸던 항목 중 하나가 R&D 예산안이다.
더불어민주당 예결위 간사인 강훈식 의원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예결위 활동일이 30일까지 고작 3일 남았는데 아직 증액심사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최소한의 수정안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예결위가 30일까지 예산안 심사를 완료하지 않으면 12월 1일 본회의에 정부가 제출한 원안이 자동 부의되는데 그 전에 야당 단독으로 수정안을 내서 처리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R&D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 이견이 워낙 커서 11월 30일은 커녕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 9일 전에 합의가 이뤄질지도 미지수다.
이런 혼란에서 가슴을 졸이는 건 결국 연구자들이다. 당장 한 달 뒤 자신의 연구 과제나 사업에 얼마의 예산이 배정될 지도 모른 채 연말을 맞고 있다. 내년 연구 계획을 세워도 모자랄 시간에 예산안이 언제 결정될 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고 있다.
총 25회에 걸친 ‘R&D 예산 돋보기’ 기획을 하면서 만난 연구자들은 정부의 무리한 예산 삭감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소통도, 원칙도 없이 갑자기 큰 규모의 예산 삭감에 나서면서 이후 벌어진 혼란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소통의 부재가 꼽혔다. 기초연구연합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천승현 세종대 물리천문학과 교수는 정부와 과학기술계를 연결하는 소통 창구가 제몫을 다 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과총이나 한림원 같은 단체들이 있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같은 정책 연구기관이 제 역할을 했다고 보기 힘들다”며 “특히 대학의 기초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협의체를 만들어서 정부와 소통 창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도 “윤석열 정부는 지난 정부 때 R&D 예산이 너무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도 과학기술계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며 “지금까지 과학기술계와 정부 사이에 R&D 예산을 두고 제대로 된 소통창구가 없었던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과학기술인 시민단체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의 김찬현 대표는 기본적으로 R&D 예산이 결정되는 과정 자체가 복잡하기 불투명한 것을 문제로 꼽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과학기술계가 스스로 과학정책이나 예산을 분석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미국은 과학자 집단에서 정책가를 기르는 문화가 있는데 한국에선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경우가 많지 않았다”며 “R&D 예산안이 어떻게 결정되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갔는지 시민들과 동료연구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원칙이 무너진 것도 이번 예산 삭감의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수백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해서 만든 ‘국가 R&D 중장기 투자전략’이 뒤집혔고, R&D 예산 배분·조정안을 기획재정부에 제출하도록 한 법률상 기한일을 어긴 것도 올해가 처음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자로 일하고 있는 이홍식 공공을 위한 과학기술인 포럼(FOSEP) 연구국장은 “이번 예산안이 확정되면 예산 계획이나 심의 절차를 다 무시해도 된다는 최악의 선례를 남길 수 있다”며 “예산을 완전히 복원하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정부의 기조가 잘못됐고, 이를 과학기술인들이 막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승현 교수는 “이번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예측 범위를 넘어서는 큰 폭의 예산 삭감이 있었다는 것”이라며 “연구자들도 자신의 연구에 대해 장기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데 예산도 마찬가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예측가능하게 배분이 되고 집행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천 교수는 “일정한 비율로 R&D 예산을 확대하는 것을 법제화하거나 중장기 재정계획을 세울 때 진짜 긴급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바꾸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