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개봉해 전 세계적인 흥행을 한 ‘쥬라기 공원’을 현실로 만드는 기술이 유전자 가위다. 영화에서는 호박에 갇혀 있던 모기의 피에서 공룡 DNA를 찾아낸 뒤에 개구리 DNA를 잘라 붙이는 방식으로 공룡을 되살렸다. SF 영화로만 여겨졌던 기술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현실을 바꾸고 있다. 유전자 교정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질병에 대한 적응력을 높인 작물이 미국과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고, 난치병 치료제도 조만간 시장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유전자 가위 기술의 선두를 달리는 국가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쟁국에 비해 과도한 규제 탓에 상업화는 늦어지고 있다. 조선비즈는 6회에 걸친 기획을 통해 유전자가위 기술의 현재와 가능성을 짚어보고, 규제 개선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편집자 주]
2021년 일본 바이오기업 사나텍시드가 혈압 상승을 막는 성분인 ‘가바(GABA)’가 일반 토마토보다 4~5배 많은 방울토마토를 선보였다. DNA의 특정 염기만 골라 바꾸는 유전자 편집 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를 적용한 첫 상업화 작물이다. 일본은 그 뒤 같은 기술을 활용해 생산량이 많은 쌀과 밀을 비롯해 도미, 복어, 고등어 같은 식용 어류의 살집을 늘리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 버클리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연구진은 가뭄 지역에서도 잘 살아남는 벼를 개발했다. 연구진은 유전자 가위로 야생벼의 유전자 2개를 바꿔서 잎 표면의 작은 구멍인 기공(氣孔) 밀도를 감소시켰다. 기공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인데 물이 드나드는 주요 통로로 활용된다. 기공밀도가 낮은 벼는 일반벼보다 물을 더 많이 보존한다. 과학자들은 이 벼가 온실에선 수확량에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가뭄이 발생한 지역에서는 수확량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영국 로탐스테드연구소는 지난 2021년 가을 건강에 좋은 유전자 교정 밀을 처음 파종했다. 밀에 아스파라긴이라는 아미노산이 많으면 이 밀가루로 구운 빵에 발암물질인 아크릴아마이드가 많이 생긴다. 로탐스테드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밀에서 아스파라긴 합성 유전자를 차단했다. 유전자 교정으로 낟알 크기를 키운 밀도 개발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당근의 조상은 원래 주황색이 아니었고 옥수수 알맹이도 작고 딱딱해서 소화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인류는 오랜 세대에 걸쳐 인위적 선택과 품종 개량을 통해 옥수수와 쌀, 콩 등의 작물을 지금의 모습으로 바꿔왔다. 현재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음식은 유기체의 게놈(유전체)을 직접 조작한 기술을 적용한 유전자 변형 작물(GMO)이다. 전세계 종자 시장의 30%는 GMO가 차지하고 있다. 판매가 승인된 GMO 작물은 감자와 호박, 파파야, 사과 등 13종류에 이른다.
수천 년 간 인류가 진화시켜 온 품종 개량의 역사는 최근 유전자 가위라는 새로운 생명공학 기술을 만나 한 번 더 거듭나고 있다. GMO는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종자에 넣어 새 특성을 갖게 만든 작물이다. 서로 다른 개체의 유전자를 섞어 자연에선 보기 어려운 작물을 만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술을 도입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GMO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이 있다. 아직 이렇다 할 부작용은 보고되지 않았지만 사람의 건강과 환경을 위협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유전자 염기를 필요한 교정하는 유전자 가위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유전자 교정 작물(GEO)이 등장하면서 이런 우려까지도 사그라들고 있다.
2019년 미국의 생명공학기업 칼릭스트가 포화지방은 적고 건강에 좋은 단일 불포화 지방산은 약 3배 더 많이 포함한 대두를 만들어 세계 최초의 GEO 작물을 생산한 이후, 연구자들은 유전자를 통째로 바꾸는 GMO보다 GEO가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거의 없다고 본다.
GEO는 유전자 DNA 염기서열 중 일부분을 바꾼 작물이다. 다른 개체의 외래 유전자를 삽입해 만드는 GMO와는 큰 차이가 있다. 작물 자체가 유전자를 일부 수정하는 건 자연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와 비슷하다. 일부 국가들은 이런 이유로 GEO를 GMO 규제 대상에 넣지 않고 위해성 평가도 대부분 면제하고 있다.
GEO는 1세대 유전자 편집 기술인 징크핑거 뉴클레아제(ZFN), 2세대 전사 활성제 유사 이펙터 뉴클레아제(TALEN), 3세대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 같은 유전자 교정 기술로 만든 작물이다. 유전자 가위는 세포 속 DNA의 특정 유전자를 바꿔치기 해서 질병을 막거나 농작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이다. DNA 서열 중 일부 염기를 인위적으로 자른 뒤, 자연적으로 회복될 때 염기 일부를 삭제하거나 삽입한다.
정밀한 육종 기술인 유전자 교정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수준의 변이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특히 크리스퍼 기술은 다른 유전자 가위 기술보다 효율이 높고 더 정교하다. GMO 작물은 위해성 평가를 위해 수년이 소요되기 때문에 개발 기간만 8~12년으로 길다. 비용도 최소 1300억원 이상이 든다. 하지만 GEO는 개발 기간은 4~6년 정도로 절반 정도로 짧고 비용은 약 1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국내 바이오 기업인 툴젠에서 종자사업을 총괄하는 한지학 종자사업본부장은 “최근 농업기술 분야 논문과 특허를 살펴보면 대부분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한 사례”라며 “미국과 중국, 남미를 중심으로 과학자들이 연구에 뛰어들어 5년 이내에 본격적인 기술 상용화가 이뤄질 것”이라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10년 뒤 GEO는 GMO의 시장 점유율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캐나다는 지난 5월 새 농업기술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면서 새로운 유전자 변형 종자를 만드는 데 더는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공표했다. GMO의 경우 그런 사실을 담은 라벨을 붙이지만 유전자 교정 종자는 더는 붙이지 않아도 된다. 일본도 유전자 가위 기술을 적용한 작물을 재료로 쓴 유전자 편집 식품을 주도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특정 기준을 충족하는 한 안전성 평가 없이 유전자 편집 작물을 소비자에게 팔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일본 과학자들은 혈압을 낮추는 가바 함량이 5배나 많은 방울토마토 외에도 비에 강한 밀과 씨 없는 토마토, 수확량이 많은 쌀과 캐놀라 품종을 이미 개발했다. 또 일본 전통 정원 식물인 나팔꽃을 보라색에서 흰색으로 바꾼 종자를 개발했고 공기 중에서 쉽게 색이 변하는 갈변 효과가 적은 사과 품종도 잇따라 개발했다.
과학자들은 유전자 가위로 개발한 GEO가 식량 부족 문제 해결에도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구 급증과 기후변화, 각종 질병에 따라 급격한 환경 변화가 겹치며 식량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표적 유전자를 정확히 교정하는 과정을 거친 종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 본부장은 “유전자 교정 기술이 확산하면서 유전 육종의 르네상스를 맞게 됐다”며 “국내 종자 시장은 7000~8000억원, 글로벌 시장은 약 60조원 규모지만 종자가 배출할 생산물을 고려하면 최대 100조원 규모까지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