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R&D 예산안은 전년대비 16.6% 삭감된 25조9000억원이다. R&D 예산이 정부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에서 3.9%로 줄었다. 33년 만의 예산 감축에 과학기술계가 큰 혼란에 빠졌지만, 수십 조원에 달하는 방대한 예산안 앞에서 정작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한 예산이 삭감됐고, 이 와중에 어떤 예산은 왜 늘었는지 제대로 아는 국민은 없다. 조선비즈는 국회 예산안 심의 시즌을 맞아 내년도 R&D 예산안에서 꼭 필요한 예산이 삭감된 건 어떤 부분인지, 늘어난 예산 중에 낭비성 예산은 없는지 찾아보기로 했다.[편집자 주]

소재와 부품, 장비 산업을 합쳐 부르는 ‘소·부·장’은 불과 3~4년전 만 해도 기술 독립의 필요성을 상징하는 시대의 유행어처럼 쓰였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이어지면서 문재인 정부 산업 정책의 핵심 키워드가 됐다. 소·부·장은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화학 등 한국의 핵심 산업 경쟁력을 뒷받침할 기반이라는 점에서 많은 투자와 지원이 이어졌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4월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소재·부품·장비 경쟁력강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기획재정부

사실 윤석열 정부가 처음 들어선 이후에도 이런 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작년 10월 18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소부장 경쟁력강화위원회를 열고 소·부·장 핵심전략기술을 기존의 100개에서 150개로 확대했다. 소·부·장 육성은 문재인 정부의 대표 산업 정책이었지만, 정권을 가리지 않고 필요한 정책은 이어받는 모습이었다. 당시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 심화 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소부장 공급망 확보가 산업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소·부·장 육성 정책마저도 비효율화를 걷어내겠다며 단행한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삭풍을 피해갈 순 없었다. 소·부·장 자립을 위한 핵심 R&D 사업 중 하나인 ‘전략핵심소재 자립화기술개발 사업’은 당초 내년도 예산이 1842억원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R&D 예산 재검토를 지시한 이후 지난 8월에 새롭게 발표된 R&D 예산안에는 1189억원으로 줄었다. 두 달여 만에 예산의 3분의 1이 사라진 것이다.

전략핵심소재 자립화기술개발 사업은 주력산업의 밸류체인 내에 필요한 첨단소재 기술을 국산화해서 대외의존도를 낮추는 사업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가전기, 기초화학, 기계금속 다섯 개 분야에서 모두 40개의 핵심소재를 선정해 국산화에 나섰다. 정권이 바뀌면서 사업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총 사업비 1조4723억원이 투입되는 큰 그림은 변함이 없었다.

이 사업의 기획에 참여한 한 정부출연연구기관 관계자는 “5대 분야에서 해외의존도가 높은 100대 소재를 골랐고 그 중에서 사업화 가능성이 큰 40개 소재를 고르는 등 준비 과정이 꼼꼼한 사업이었다”며 “성공적으로 사업이 진행되면 2030년까지 4조원이 넘는 경제적 가치를 낼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 사업에는 2022년과 2023년에 각각 1842억원이 투입됐고, 내년에도 마찬가지 예산이 배정됐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으로 내년에 수행할 52개 계속 과제의 과제당 평균 지원 예산도 35억1700만원에서 22억8700만원으로 낮아졌다.

52개 계속과제 중에는 윤석열 정부가 선정한 87개 대(對) 일본 핵심 전략기술에 해당하는 과제가 36개나 포함돼 있다. 2025년 사업 종료를 앞두고 사업화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점에 갑자기 예산이 대폭 삭감돼 최종 사업화 가능성마저 어두워진 셈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한 핵심전략품목 자립화라는 성과 달성이 어려워질 수 있다”며 “예산 감액이 적절했는지 예산 심사 과정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정처는 “계속과제에 대한 연구비를 일률적으로 감액하는 것이 아니라 과제별 단계평가 등 그동안의 연구개발 성과를 반영해서 사업화 가능성이 높은 과제와 그렇지 않은 과제를 구분해서 예산을 조정하는 게 맞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