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제1차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을 발표하며 지역의 과학 생태계 조성에 나선 지 올해로 25년이 지났다. 하지만 국가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서 예산과 인력 같은 지표를 보면 수도권 쏠림 현상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지역의 과학기술 혁신 역량을 점검하고, 수도권과 지역이 함께 성장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 봤다.[편집자 주]
네덜란드는 풍차와 제방의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수백㎞를 가다보면 우리의 강원도처럼 탄광이 있던 지역을 마주하게 된다. 벨기에, 독일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림뷔르흐(Limburg)주다. 한때 이곳은 네덜란드에서도 비교적 개발이 덜 된 지역이었다. 그나마 지역 경제를 책임지던 탄광이 1960년대에 고갈되면서 인구가 급감하고 도시는 활력을 잃었다. 석탄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폐광지역의 경제가 무너진 강원도 정선 일대와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같은 문제를 놓고 네덜란드와 한국이 꺼내든 해결책은 달랐다. 한국은 강원도 정선에 카지노를 중심으로 한 복합 리조트 시설인 강원랜드를 지었다. 내국인 카지노를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의도였지만, 2000년 카지노가 문을 연 이래 도박 중독 등 부작용이 계속되고 있다. 카지노가 벌어들인 돈이 지역 사회에 제대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계속된다.
반면 네덜란드는 지역 주도로 과학 혁신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길을 택했다. 카지노를 짓는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길이었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혁신 클러스터 조성에 나섰다. 이른바 ‘브라이트 랜드(BrightLands)’의 시작이다.
브라이트 랜드는 네덜란드 림뷔르흐 지역에 있는 4개의 혁신 캠퍼스를 기반으로 한다. 림뷔르흐의 주도인 마스트리히트에 세우려던 지역 대학을 4개의 캠퍼스로 나눈 것이다. 이 4개의 캠퍼스가 연구중심 대학으로 성장하면서 혁신 클러스터의 연결 고리가 됐다.
캠퍼스 네 곳은 각각 석유화학·블록체인·스마트팜·헬스케어를 담당한다. 한국으로 치면 대한석탄공사 같은 공기업이었던 ‘DSM’을 석유화학·바이오 분야의 민영 기업으로 탈바꿈해서 클러스터에 대한 투자를 책임지게 했다. DSM이 앵커 기업으로 앞서 나가면서 스타트업을 키우고 지역의 대학들과 공동 연구개발(R&D)도 진행하고 있다.
폐광 지역의 어둡던 과거에서 벗어나 스타트업과 젊은 연구자들이 가득한 지역이 되면서 이 곳을 ‘브라이트 랜드’라고 부르게 됐다.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돼 50년이 지난 지금은 372개 기업과 1만3398명의 학생, 1만5602명의 직원이 브라이트 랜드에 거주하며 네덜란드의 과학기술 혁신을 이끌고 있다. 전 세계 혁신 클러스터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주목받으며 매년 이곳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많은 연구자와 정책 입안자들이 브라이트 랜드를 찾는다.
브라이트 랜드의 성공 사례를 직접 분석한 안준모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생태계’의 유무가 브라이트 랜드와 국내 혁신 클러스터와의 차이라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브라이트 랜드는 대기업이 있고 대기업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이 있고 기술과 사람을 이어주는 대학이 있다”며 “대기업과 스타트업, 대학의 생태계를 통해서 지역 경제가 살아나면서 고용이 창출되고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도 자생력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가 지적한 생태계의 핵심 요소는 ‘대기업’과 ‘자생력’이다. 바꿔서 말하면 한국의 혁신 클러스터에 없는 두 가지이기도 하다.
안 교수는 한국의 대덕연구개발특구(대덕특구)와 브라이트 랜드의 차이점이 앵커 역할을 할 대기업의 유무라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연구 클러스터인 대전을 보면 한국과학기술원(KAIST)도 있고 연구기관도 많지만, 정작 앵커 역할을 해줄 대기업이 없다”며 “브라이트 랜드에서 DSM이 해준 역할, 미국의 혁신 생태계에서 구글이나 애플이 해준 역할을 해줄 기업이 없다보니 생태계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국토 절반이 혁신 클러스터” 자조 섞인 목소리도
혁신 클러스터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산·학·연·관이 유기적으로 연계해 과학기술 지식의 생산부터 기술의 사업화까지 기술 혁신 전과정을 선도하는 지역으로 설명한다. 기업(산), 대학(학), 연구기관(연), 중앙·지방정부(관)의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는 의미다.
한국도 혁신 클러스터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다. 문제는 사공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혁신 클러스터 지원 제도는 10개에 달한다. 대덕특구 같은 연구개발특구 제도부터 지방과학연구단지, 강소특구, 국가혁신융복합단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산업기술단지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제도가 너무 많다보니 관리도 제대로 안 되고, 활용도 제대로 안 된다.
국내에 존재하는 10개의 혁신 클러스터 제도는 지정 근거가 되는 법률이 모두 다르다. 그러다 보니 주무부처도 제각각이고, 전담 기관도 다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보건복지부 등이 저마다 혁신 클러스터를 운영하고 있다. 사실상 기능과 역할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김성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지역혁신정책센터장은 “혁신 클러스터 제도를 부처마다 따로 운영하다보니 효율성이 떨어지고 역할이 겹치는 경우도 많다”며 “연구 현장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국토의 절반이 혁신 클러스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혁신 클러스터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웅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부연구위원은 “한국의 클러스터 정책은 물리적으로 단지를 조성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보니 정부에서 지역을 지정해주기만 하고 대학이나 기업, 연구기관에 너희가 알아서 생태계를 만들어보라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나마도 생태계에 대한 고민 없이 국토 개발 차원에서 지역마다 ‘n분의 1′씩 나눠주는 방식으로 클러스터를 짓다보니 자생력을 갖추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이야기다.
안 교수도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안 교수는 “한국의 혁신 클러스터 정책은 산업단지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문제”라며 “땅을 정비하고 수도 깔고 도로 깔고 용지를 싸게 공급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동산 정책하듯 땅에 선을 그어놓고 기업이나 연구기관을 입주시키면 알아서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는 착각이 한국의 혁신 클러스터 정책이었다는 의미다.
안 교수는 “부지는 싸게 주고 세금을 깎아주니 기업이나 연구기관이 입주는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성장하더라도 기업이 어느 정도 크면 클러스터를 떠나려고 할 수밖에 없다”며 “혁신 클러스터가 성공적으로 유지되려면 수직계열화가 필수적인 만큼 대기업의 역할이 아주 큰데 한국의 혁신 클러스터 정책은 대기업이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는 혁신 클러스터 구조조정에 시동을 걸었다. 단지, 벨트, 지구, 클러스터, 파크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혁신 클러스터의 운영 현황 전반을 조사하고 해외 클러스터 제도와 비교해 운영 효율화 방안을 찾는다는 계획이다. 올해 8월쯤 연구용역 결과가 나오면 일부 클러스터가 통·폐합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혁신은 ‘집’에서 시작된다… 정주여건부터 챙겨라
판교나 홍릉, 송도 같이 수도권 지역에 자리한 클러스터는 그나마 생태계가 돌아가고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 클러스터는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는 지속 가능성이 없다는 지적을 듣는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전문가들은 정주여건을 이야기한다. 안 교수는 “한국의 클러스터 정책에서 빠져 있는 한 가지가 ‘사람’”이라며 사람이 어떻게 지역에 정착할 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 교수가 사례로 든 지역이 판교다. ‘판교테크노밸리’는 한국의 혁신 클러스터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그런데 판교에는 앵커 역할을 할 대기업이 마땅치 않다. 네이버 같은 정보통신(IT) 기업이 있지만 생산시설이 없다보니 앵커 역할을 할 만한 대기업은 아니다.
그런데도 판교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분당’이라는 베드타운의 역할이 컸다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구미나 새만금에 좋은 클러스터를 구축해봤자 사람이 살 수 있는 정주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자리잡을 수가 없다”며 “분당이라는 베드타운, 그리고 신분당선이라는 교통 인프라가 판교가 자리잡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비교적 성공 사례로 꼽히는 클러스터는 대부분 판교와 마찬가지로 정주여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홍릉강소연구특구는 서울 시내와 가깝고 송도 바이오클러스터도 인근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며 정주여건 문제를 해결했다.
해외 클러스터 관계자들도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의 리서치트라이앵글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혁신 클러스터다. 1950년대만 해도 노스캐롤라이나주는 미국 전체에서 소득 순위가 49위에 머무를 정도로 낙후됐지만, 리서치트라이앵글을 조성하면서 지금은 미국의 IT 혁신을 이끄는 지역이 됐다.
리서치트라이앵글은 듀크대,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노스캐롤라이나대 같은 대학을 거점으로 삼고, IBM, 제너럴일렉트릭 같은 대기업이 연구기관을 옮겨오면서 성장했다. 이곳을 운영하는 리서치트라이앵글재단 관계자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리서치트라이앵글도 처음 5년은 성과를 못 내다가 대기업 유치에 성공하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며 “지역의 생활비가 저렴하다는 점을 내세워 기업을 유치했고, 인근 대학에서 나오는 유능한 인재도 기업 입장에선 매력적인 부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정보통신과 생명공학에 특화된 영국의 케임브리지 클러스터도 마찬가지다. 캐런 케네디 영국 케임브리지대 협력전략국장은 “케임브리지 클러스터는 기술 상용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이를 위해 단순히 대학과 기업이 협업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기업을 클러스터에 입주시킨 뒤 기술 상용화를 지원하는 전문 컨설팅 조직이 나서서 직접 기업의 수요와 공급을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케네디 국장은 “기업이 클러스터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사람이 케임브리지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지방 정부와 함께 교통을 정비하고 연구자가 머물 수 있는 주택을 지원하는 등 인프라에 대한 투자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