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과 왼손의 입체 구조는 동일해 보이지만 왼손용 장갑을 오른손에 착용할 수는 없다. 이처럼 서로 거울상 대칭이지만 서로 겹쳐지지 않는 특성을 거울상 이성질 또는 카이랄성이라고 한다.

아미노산, 핵산(DNA), 단백질 등 다양한 생체 분자에서 보이는 카이랄성은 생명 현상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컨대 카이랄 분자인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를 약으로 사용하는 경우 해당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의 조성이 같더라도, 카이랄성에 따라 생명체 내에서 반응은 정반대다. 임산부의 입덧을 치료하는 치료제로 쓸 수 있는가 하면, 반대의 카이랄성을 갖는 경우엔 태아의 신체 발달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 때문에 카이랄성을 분석하는 건 생리학, 화학, 약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중요한 과제로 여겨진다. 지금도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두 원평광에 대한 흡수도 차이를 통해 분자의 카이랄성을 분석하는 방법이 있지만, 고농도의 시료가 필요하고 측정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카이랄 금 나노 입자의 규칙적 조립 구조의 암시야상 현미경 사진과 실제 소자의 사진. /과기정통부 제공

이런 단점을 개선한 새로운 카이랄성 측정기술을 한국 연구진이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서울대학교 남기태 교수, 고려대학교 이승우 교수, 박규환 교수로 구성된 공동연구팀은 카이랄 나노입자 기반 빛-물질 간 상호작용에 대한 새로운 물리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활용해 분자의 카이랄성 분석에 성공했다. 이번 연구 성과는 네이처에 15일 게재됐다.

한국 연구진이 찾아낸 새로운 분석법은 카이랄 금 나노 입자의 2차원 조립 구조를 활용한 것이다. 카이랄 금 나노 입자는 고유의 기하 구조로 인해 입사되는 원편광과 공진해 원편광을 나노 입자 근처에서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나노 입자가 배열된 2차원상에 카이랄 분자를 도입해 원편광과 카이랄 분자간의 흡수도 차이를 극대화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카이랄 금 나노 입자의 배열로 비롯된 카이랄 신호 증폭이 가시광을 포함한 영역대에 존재한다는 점을 이용해 특별한 도구 없이 분자의 카이랄성을 구분할 수 있는 육안 기반 카이랄성 센서를 제시하는데도 성공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가 생체 재료 합성 및 물질 분석이 중요한 분석학, 진단학, 약학 등 다양한 산업뿐만 아니라 화학, 생물학, 물리학 등 기초 학문 분야에도 큰 파급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기태 서울대 교수는 “대한민국 연구진이 함께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새로운 소재 개발 등 후속 연구를 통해 초격차 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업을 탄생시키고자 한다”고 말했다.

공동연구를 진행한 서울대·고려대 연구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승우 고려대 융합에너지공학과·KU-KIST융합대학원 교수, 남기태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박규환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왼쪽 아래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유석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김령명 서울대 재료공학부 연구원, 허지혁 고려대 KU-KIST융합대학원 연구교수. /과기정통부 제공

공동교신저자인 고려대학교 이승우, 박규환 교수는 “생체모방 재료공학과 전산나노광학의 창의적 융합을 통해 카이랄 분자 센싱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는 점이 크게 고무적이며, 육안으로 분자의 카이랄성을 구별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새로운 연구방법론(계산과학 등)을 활용해 새로운 물성과 기능을 구현하는 신소재를 개발하는 ‘미래소재디스커버리지원 사업’의 지원을 받았다.

참고자료

nature, doi : Enantioselective sensing by collective circular dichro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