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사무실을 시원하게 해주는 에어컨은 현대 사회의 필수품이다. 기후변화로 여름철 폭염이 일상화되면서 에어컨 없는 여름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에어컨을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지구는 더워진다. 바로 냉매 때문이다.
에어컨이나 냉장고 같은 냉방장치는 수소불화탄소(HFC) 계열의 냉매를 사용한다. HFC는 오존층 파괴물질인 프레온가스(CFC)를 대신해 1980년대부터 쓰이고 있지만, 역시 지구에 해롭다. HFC의 지구온난화지수는 이산화탄소의 2000배에 달한다. 집과 사무실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 에어컨을 쓰면 쓸수록 지구는 더워지는 역설이다.
한국 과학자들이 냉매의 문제점을 극복할 혁신 기술에 도전한다. 한국연구재단 한계도전전략센터는 최근 2025년 신규 연구 추진을 위한 의견요청서(PIR)를 공고하며 3가지 연구주제를 공개했다. 그중 소재 분야의 신규 연구 주제가 ‘냉매 없는 세상을 향한 고체냉각 혁신기술’이었다. 한계도전 프로젝트는 실패 가능성이 크지만 성공할 경우 파급력이 큰 연구개발(R&D)에 지원하는 정부 사업이다.
전 세계 200개 국가가 2016년 협약을 맺고 HFC의 단계적 감축에 합의했지만, 여전히 큰 변화는 없다. 인도, 파키스탄, 중동 등은 아직 HFC 감축에 나서지 않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HFC 같은 냉매를 사용하는 압축식 냉각방식을 대신할 마땅할 기술이 없다는 점이다.
압축식 냉각방식은 이렇게 작동한다. 먼저 기체인 냉매를 압축해서 온도와 압력을 높인 뒤, 응축기에서 냉각해 액체로 만든다. 이후 증발기에서 압력을 낮춰 기체로 증발시키면서 에어컨이나 냉장고 내부의 열을 흡수한다. 압축식 냉각방식은 냉매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 냉매가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꼽힌다.
HFC는 프레온 가스처럼 오존층을 직접 파괴하지는 않지만,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해 지구온난화를 일으키고 있다. 보다 친환경적인 냉매를 만들기 위해 전 세계 연구진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확실한 해결책은 없다.
최근에는 ‘고체냉각’이라는 새로운 냉각방식이 주목 받고 있다. 고체냉각은 냉매 없이 냉각을 하는 기술이다. 고체의 상전이를 통해 열의 흡수와 방출을 유도하는 원리다. 상전이는 외부 조건에 따라 물리적 성질이 다른 상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어떤 물질과 방법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자기열량(magnetocaloric), 탄성열량(elastocaloric), 전기열량(electrocaloric) 등 여러 방식이 있다.
다만 고체냉각 기술은 비교적 최근 들어 연구가 본격화됐고, 기술적인 난이도가 높아 아직 전 세계 어디에서도 상용화에 성공하지 않은 상태다. 한국이 온실가스 주범인 에어컨 냉매를 대신할 고체냉각 기술에 도전하기로 했다.
한계도전 R&D 프로젝트에서 고체냉각을 담당하는 김동호 책임PM(프로그램 매니저)은 “왜 아직도 고체냉각 기술이 기존의 압축식 냉각기술을 대체하지 못하는지, 시스템 차원에서 고체냉각 기술의 실용화를 가로막는 근본적 한계는 무엇인지, 이를 해결할 방법은 있는지 찾기 위한 프로젝트”라며 “3년 안에 프로토타입(시제품)까지 제작할 수 있는 수준의 아이디어를 찾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고체냉각 기술 개발은 전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자기열량 방식은 자성을 띠는 물체에 자기장을 걸면 온도가 올라가고 반대로 자기장을 제거하면 온도가 떨어지는 원리를 이용한다. 이 방식으로 ㎾(킬로와트)급의 냉각 시스템을 구현한 해외 연구진도 있다. 다만 이 방식은 강한 자기장 발생을 위해 희토류 영구자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장 발생 장치가 커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탄성열량 방식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기계적 스트레스에 의해 열을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특성을 이용한다. 2023년에는 니티놀(NiTi) 튜브 다발 구조를 이용해 260W의 냉각 출력과 22.5K(절대온도, 0K는 섭씨 -273도)의 온도 차이를 달성한 연구 결과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리기도 했다.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기존 냉매 기반 압축식 냉각기술에 비해 냉각 밀도나 온도변화 등이 부족해 상용화는 쉽지 않다. 국내에서도 몇몇 연구자들이 고체냉각과 연결되는 상전이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지만, 냉각 기술까지는 이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김 책임PM은 아직 전 세계 어디에서도 고체냉각 기술을 충분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도 시장을 선점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이고, 한국이 관련 기술을 확보하면 지구환경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공익적 측면과 냉난방 시장의 산업적 가치 측면 모두에서 매우 큰 임팩트가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Science(2023), DOI :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di5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