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 환자의 신경통이 대변 이식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건강한 사람의 장내 세균이 염증을 억제해 신경 손상을 막는다는 것이다.
미국 럿거스대 생화학미생물학과의 리핑 자오(Liping Zhao) 교수와 중국 장저우대학병원 내분비과의 휘주안 유안(Huijuan Yuan) 교수 연구진은 14일 국제 학술지 ‘셀 메타볼리즘’에 “건강한 사람의 대변을 이식해 당뇨병성 신경병증 환자의 통증을 35%까지 줄였다”고 밝혔다.
◇항염증 세균 늘고, 독성 세균 감소
당뇨병성 신경병증은 고혈당으로 생긴 생체물질이 독으로 작용해 신경세포를 죽이거나 변성시키는 질병이다. 화끈거리고 저린 증상이 나타나며, 심하면 칼에 베이는 것 같은 통증을 유발하지만 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는 실정이다. 원인 치료는 하지 못하고 통증을 줄이는 약을 주로 처방한다.
연구진은 먼저 당뇨병성 신경병증 환자의 대변을 당뇨병을 유발한 생쥐에게 이식했다. 그러자 신경병증 환자처럼 말초신경이 손상됐다. 연구진은 장내 세균이 신경병증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환자와 일반인 86명의 대변을 채취해 분석했다. 이 중 27명은 당뇨병성 신경병증이 있었고, 30명은 신경병증이 없는 당뇨병 환자였다. 나머지는 당뇨병이 없었다.
대변에 있는 장내 세균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했더니, 당뇨병성 신경병증이 있는 환자는 장내 세균 13종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았다. 이 장내 세균들은 신경병증 환자의 장내 세균의 12%를 차지했지만, 다른 사람은 2% 미만이었다. 연구진은 해당 세균들을 줄이고 다른 유익한 장내 세균을 늘리면 신경병증 치료 효과가 나올 수 있다고 추정했다.
연구진은 당뇨병이 없는 사람의 대변 시료를 당뇨병성 신경병증 환자 22명에게 이식했다. 다른 환자 10명에게는 호박과 감자 분말로 만든 가짜약을 투여했다. 건강한 사람의 대변 시료를 이식한 후 84일이 지나자 부티르산을 만드는 장내 세균이 늘었다. 부티르산은 장내 세균이 만드는 가장 중요한 대사물질로, 염증을 막는 효과가 있다. 동시에 독성 물질을 분비하는 장내 세균은 줄어들었다.
장내 세균의 구성이 바뀌자 환자의 신경 통증이 35% 줄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가짜약을 투여한 환자는 5% 감소에 그쳤다. 연구진은 가짜약을 투여한 환자에게 다시 건강한 사람의 대변 시료를 이식했다. 그러자 84일 후 역시 부티르산을 분비하는 장내 세균이 늘고, 독성 물질을 만드는 세균은 감소했다.
자오 교수는 대변 이식이 다른 질환의 신경 통증도 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통증 감소 효과가 대변 이식 후 3개월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대변 이식과 함께 유익한 장내 세균이 좋아하는 영양분을 제공하는 식이요법을 병행하면 치료 효과가 더 오래 갈 수 있다고 밝혔다.
◇대변 동결건조한 캡슐 형태 약도 등장
현재 대변 이식은 ‘클로스트리듐 디피실균(菌)’에 의한 치명적 설사병을 치료하는 데 쓰이고 있다. 다른 병에 걸려 항생제를 강하게 처방하면 유익한 세균은 죽고 디피실균 같은 악성(惡性) 세균이 증식해 극심한 장염과 설사 등을 유발한다. 미국에서는 매년 50만 명이 이 병에 걸린다. 보통 항생제로 치료하는데 20%는 약이 듣지 않아 매년 3만 명이 사망한다. 대변 이식은 이들에 대해 86%의 완치율을 보였다.
지금은 기증 받은 대변에 식염수를 넣어 액체 상태로 만들고 환자에게 이식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코나 입으로 주입하거나 내시경으로 대장에 직접 주입한다. 바이오 기업들은 장내 세균이 든 용액을 동결 건조해 캡슐 형태로 만들어 환자의 불편을 크게 줄였다.
미국 세레스 테라퓨틱스(Seres Therapeutics)는 지난 4월 미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먹는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보우스트(Vowst)’ 품목 허가를 받았다.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두 번째 FDA 승인이자, 먹는 약으로는 처음이다. 앞서 지난해 12월 FDA 허가를 받은 스위스 페링 파마슈티컬즈(Ferring Pharmaceuticals)의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는 좌약 방식이었다. 두 약 모두 장내 세균을 이용해 클로스트리듐 디피실 감염증을 치료한다.
장내 세균이 질병을 치료하고 노화까지 억제한다고 밝혀지면서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앞다퉈 장내 세균을 치료제로 개발하고 있다. 최근 대변 이식을 다른 질병 치료로 확장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장내 세균이 암이나 당뇨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잇따라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사람이나 물만 먹어도 살찌는 사람에게는 고유의 장내 세균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우울증이나 자폐증, 치매도 장내 세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일 캐나다 로슨 보건연구원은 피부암인 흑색종 환자에게 면역 치료제와 함께 캡슐 형태로 건강한 사람의 대변 속 장내 세균을 이식한 임상 시험 결과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메디슨’에 발표했다. 면역 치료제는 환자의 면역 체계를 자극해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한다. 면역 치료제가 듣는 흑색종 환자는 절반에 그치는데, 앞서 연구에서 장내 세균이 치료 효과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임상시험에서 대변을 이식한 환자는 65%가 치료에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장내 세균은 노화까지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연세대 김지현(시스템생물학과), 남기택(의대) 교수 연구진은 올 초 국제 학술지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에 “나이 든 쥐가 젊은 쥐의 대변에 있는 장내 세균을 이식받고 근육, 피부가 젊어졌다”고 밝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크리스토프 타이스 교수 연구진은 지난해 12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바퀴를 다른 생쥐보다 5배나 많이 돌리는 생쥐는 장내 세균이 달랐다고 밝혔다. 나이가 들어 운동을 싫어하는 것이 장내 세균 때문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참고 자료
Cell Metabolism(2023), DOI: https://doi.org/10.1016/j.cmet.2023.06.010
Nature Medicine(2023), DOI: https://doi.org/10.1038/s41591-023-02453-x
Microbiome(2023), DOI: https://doi.org/10.1186/s40168-022-01386-w
Nature(2022),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2-05525-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