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물보안법(BIOSECURE Act)에 따른 탈중국 공급망 재편 수혜는 그동안 삼성바이오로직스·셀트리온 등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중심으로 거론돼 왔다. 우시바이오로직스 등 중국계 바이오 기업들이 글로벌 빅파마의 항체의약품 생산을 대거 맡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공급망 재편 효과는 저분자 원료의약품(API) 위탁생산 영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국내 업체 가운데서는 유한양행(000100)의 100% 자회사 유한화학과 동아쏘시오그룹 계열 에스티팜(237690)이 주목받고 있다.
생물보안법에 따라 기존 계약은 2032년까지 유예되지만, 신규 프로젝트와 계약 갱신 물량은 2028년부터 사실상 중국 기업 참여가 제한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제약사들의 문의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며 "2분기 이후 국내 업체들의 수주 공시가 잇따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탈중국 핵심은 '신약용 API'…락인 효과 주목
바이오의약품은 살아있는 세포를 배양해 생산하기 때문에 공정 이전 비용이 막대하고 생산시설 변경에도 긴 시간이 걸린다. 반면 저분자 API는 화학 합성 기반인 만큼 상대적으로 공급사 교체가 쉽고 글로벌 생산업체도 많다.
'신약용 API' 시장은 다르다. 신약용 API는 원료 공급뿐 아니라 공정 개발과 품질 데이터 축적 과정이 함께 이뤄진다. 임상 초기부터 제조 데이터를 쌓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의약품청(EMA) 허가 자료에 반영하는 만큼, 공급사를 변경하면 제조소 검증과 규제 승인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한다.
이 때문에 통상 임상용 시료 생산부터 상업화 물량 공급까지 동일 업체가 맡는다. 한번 공급망에 진입하면 장기간 거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구조다.
◇유한화학, '발효 기반' 앞세워 글로벌 공급망 진입
유한화학은 발효 기반 저분자 API 생산에 강점을 가진 업체다. 유한양행이 글로벌 수주를 확보하면 유한화학이 생산을 담당하는 구조다.
그동안 면역억제제·항바이러스제 등 '저마진 대량생산' 품목 중심으로 성장해왔지만 최근에는 글로벌 신약 공급망 참여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한화학의 생산 규모는 금액 기준 2023년 1647억원에서 지난해 3239억원으로 증가했다. API 비중이 절대적인 유한양행의 해외사업 매출 역시 같은 기간 2411억원에서 3865억원으로 확대됐다.
미국 길리어드사이언스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치료제 관련 상업화 물량이 확대된 영향이다. 임상용 공급에서 상업화 물량 단계로 전환되며 생산 규모와 단가가 동시에 커졌다는 분석이다.
실제 유한화학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229억원으로 전년 대비 약 90% 증가했다. 영업이익률도 7.9%로 개선됐다.
수주 기반도 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유한화학의 수주잔고는 2억1700만달러(약 3000억원) 수준이다. 올해부터 2027년까지 이어질 물량 상당 부분을 확보한 상태다. 지난 6일에는 미국 브릿지바이오파마와 약 560억원 규모 심근병증 치료제 원료의약품 공급계약도 체결했다.
생산능력도 확대 중이다. 유한화학은 현재 약 99만5000L 규모 생산설비(HB동)를 보유하고 있으며, 29만L 규모의 추가 증설(HC동)을 추진하고 있다. 완료 목표 시점은 내년 하반기다.
◇상업화 비중 높아진 에스티팜…비만 시장 노크
에스티팜은 고부가가치 영역인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올리고) CDMO에 집중하고 있다. 올리고는 리보핵산(RNA) 기반 치료제 원료로 사용되는 물질이다. 일반 저분자 API보다 제조 난도가 높아 안정적으로 생산 가능한 업체가 적다.
회사는 1분기 매출 670억원, 영업이익 115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시장 컨센서스 30% 이상 상회했다. 올리고 매출은 404억원이다. 이 가운데 상업화 물량은 271억원으로 67%를 차지했다.
2023~2024년 34~64% 수준이었던 에스티팜의 상업화 물량 비중은 올해 77%까지 높아질 것으로 추정된다. 1분기 말 기준 올리고 수주잔고는 약 3400억원으로, 이 중 상업화 물량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총 수주잔고는 4600억원이다.
저분자 API의 매출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46억원으로 전년 동기(11억원) 대비 300% 이상 증가했다. 지난해 상업화 단계에 진입한 프로젝트 2개에서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한 결과다.
에스티팜은 지난해 제2올리고동을 준공하며 올리고 생산능력을 기존 연 6.4몰(mol)에서 14몰 수준으로 늘렸다. 연내 추가 증설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제2올리고동 내 예비 공간에 설비를 들이는 방안이 유력하다.
에스티팜은 GLP-1 계열 비만 치료제 원료 시장 진출도 준비 중이다. 올리고와 GLP-1 펩타이드를 결합한 원료 개발을 검토하고 있다. 아직 상용화된 사례가 없는 방식으로, 기존 치료제의 근육 손실 부작용을 RNA 기반 기전으로 해결하는 접근이다.
◇수주 기대 커지지만…차입 부담·고객 편중 상존
시장은 두 회사의 생산능력 확대 속도에 주목하고 있다. 정희령 교보증권 연구원은 "유한화학은 현재 약 100만L 규모 생산능력을 최대 수준으로 가동하고 있다"며 "HC동 증설은 3월에 시작된 만큼 2028년 상반기 상업화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지원 흥국증권 연구원은 "에스티팜 제2올리고동은 올해 가동률 60%, 내년 '풀가동'이 전망된다"며 "글로벌 RNA 치료제 시장 확대와 함께 올리고 수주 증가, 상업화 비중 확대에 따른 믹스 개선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대규모 증설이 곧바로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해 유한화학의 매출원가율은 약 90% 수준으로 높은 편이다. HC동 증설 과정에서 차입 부담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차입금 규모는 약 2600억원 수준이며 올해 2월에도 산업은행 차입이 추가됐다.
에스티팜 역시 증설 과정에서 운전자본 부담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말 현금성자산은 1년 전 대비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고 재고자산은 400억원 이상 증가했다.
소수 글로벌 고객사 의존도가 높다는 점도 리스크로 거론된다. 상위 5개 고객사 매출 비중은 지난해 기준 약 70% 수준이다. 주요 파이프라인의 임상 지연이나 상업화 실패 시 실적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