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한미타워 앞. /허지윤 기자

한미약품(128940)그룹이 창업자 일가의 경영권 분쟁을 마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지만, 이번에 비상근 이사인 최대주주가 측근을 내세워 경영 전반에 관여하면서 내부에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제약사의 핵심 경쟁력인 연구개발(R&D)과 품질관리(QC)에서 비용과 인력을 줄이라고 하고, 신약 개발 대신 외부에서 약을 도입하거나 병·의원 대상으로 인센티브 영업까지 하라고 지시해 내부 반발이 커지고 있다.

24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의 추천으로 한미약품 자문위원으로 합류한 배인규 고문이 최근 한미약품 팔탄공장에 출근하면서 강압적으로 지시를 내려 직원 사이에 불만이 커지고 있다. 배 고문은 현대차 출신으로 알려졌다.

한미약품그룹 직원들은 배 고문이 팔탄공장에서 R&D 비용과 인력 감축을 하라고 강도 높게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한미약품 직원 A씨는 "그룹 내 직원들 사이에서 배 고문은 '신동국 회장의 아바타'로 불린다"고 했다.

신동국 회장은 지주사 한미사이언스(008930) 지분 16.43%을 보유한 최대주주로, 한미사이언스 기타비상무이사다. 한미약품 직원 B씨는 "신 회장이 배 고문 입을 빌려 한미약품 경영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있는데, 기타 비상무이사의 권한 밖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논란이 일자, 신 회장은 "배 고문이 인력 조정이나 투자 비용 절감 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언론에 밝혔다. 내부 직원들의 주장을 부인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비즈가 복수 인사로부터 제보받은 녹취록은 신 회장의 말과 달리 한미약품그룹 직원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법률 자문을 거쳐 녹취 영상에서 배 고문과 제보자의 음성을 모두 변조했다.

공개한 녹취록은 제보자들로부터 받은 녹취 중 배 고문이 직원들에게 한 발언 중 일부 내용이다. 녹취록을 보면 신 회장이 배 고문을 통해 한미약품 경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정황이 충분히 확인된다.

배 고문은 한 직원의 보고를 받으며 "지랄 염병을 떨다가 회사가 이 꼬라지가 된 거다"라고 호통을 치면서 인력 감축을 통한 비용 절감 방안을 주문했다. 그는 "R&D 비용을 줄이고 다른 데서 약 사오는 게 낫다", "품질관리(QC) 인력을 많이 줄여라"고 말했다.

심지어 "무슨 어떤 새로운 인센티브를 병원에다가 제공하든지"와 같이 불법 리베이트(약품 채택 댓가)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병·의원, 약국 상대 영업·마케팅 강화도 지시했다.

배 고문의 발언은 신약 R&D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품질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고(故) 임성기 회장의 경영과는 거리가 있는 발언이다. 제약업의 법 제도에 대한 이해 수준이 낮다는 점도 엿볼 수 있다.

한미약품 직원 C씨는 "제약업 경험도 없는 외부인이 회사에 들어와서 업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으니 직원들의 사기가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들이 그저 비용을 줄여 단기적인 재무만 개선하는 데 급급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결국 최대 주주가 주가 부양 후 지분을 매도하거나 회사를 넘겨 차익을 실현하겠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은 2024년 9월 2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임성기 회장이 일궈놓은 한미그룹의 회장 자리에 앉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조선일보

신동국 회장은 경기 김포에서 한양정밀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과거 임 회장 권유로 2010년 한미약품 주식 지분을 매입했다. 두 사람 모두 김포 통진읍 가현리 출신이며, 통진고등학교(옛 통진종합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신 회장은 지난해 한미약품 창업자 일가의 경영권 분쟁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지난해 6월 장·차남 형제 측에 힘을 실어주며 한미약품 기타비상무이사로 선임됐고, 이후 모녀 측으로 돌아서면서 같은 해 11월 한미약품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의 기타비상무이사도 맡았다.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은 지난 2월 장·차남인 임종윤·종훈 형제가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와 대표이사에서 각각 사임하며 모녀인 송영숙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한미약품그룹은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고 대주주는 후방에서 지원하는 체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지난 3월 한미사이언스 주주총회에서 임성기 창업주의 배우자인 송영숙 회장이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김재교 전 메리츠증권 부사장이 전문경영인으로서 이어받았다.

예상과 달리 신동국 회장은 대주주로서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행보를 보였다. 신동국 회장은 비상근직인 기타비상무이사지만 지난 3월 지주사 주주총회 이후 주 2회 정도 서울 송파구 한미약품 본사에 출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은 한미약품 본사 17층에서 임종윤 전 대표이사가 쓰던 사무실을 쓰고 있다.

한미약품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신동국 회장의 의중이 배 고문을 통해 전달되고 한미약품 출신 전문경영인인 박재현 대표가 관련 내용을 사후에 인지하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외부에서 영입한 김재교 지주사 대표도 신동국 회장과 교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김 대표가 유한양행에서 바이오 기업의 기술을 도입해 폐암 신약 렉라자로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자체 개발보다는 외부 기술을 사들여 개발하는 방식을 도입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배 고문이 R&D와 신약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미약품은 후보물질 발굴부터 내부에서 진행했는데, 이제 유한양행처럼 외부에서 후보물질을 사들여 개발하고, 이를 다시 기술 수출하는 구조로 갈 수 있다"며 "한미 창업자가 주도해 온 R&D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자칫 경영권 분쟁이 재점화할 소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