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일가 모녀와 형제가 둘로 나뉘어 경영권 분쟁 중인 한미약품그룹이 이번엔 지주사와 계열사의 전문경영체제 확립과 인사권을 두고 또다시 갈등이 불거졌다.
한미그룹의 핵심 회사인 한미약품(128940)이 독자 경영 체제 확립을 선언하며 내부에 별도 인사·법무 조직을 신설하겠다고 선언하자,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008930)를 이끄는 임종훈 대표이사가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이사를 ‘사장’에서 ‘전무’로 강등하는 인사를 기습적으로 발표해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28일 오후 박 대표 인사 강등을 발표한 임종훈 대표이사는 한미약품 창업자 고(故) 임성기 선대 회장과 모친 송영숙 회장의 차남이다. 한미약품을 이끌고 있는 박재현 대표이사는 한미약품에서 30년 이상 일한 전문경영인으로, 대주주 3자 연합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과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는 30일 오전 서울 송파구 한미타워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미약품의 인사·법무를 지주사로부터 독립화하는 것은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과 기업 가치를 높이는 데 필요한 조치”라며 “더구나 이는 이전부터 그룹 내에서 검토돼온 사안”이라고 밝혔다.
전날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가 “한미그룹사는 인사 발령시 인사팀을 경유하고 지주사 대표이사의 협의 후 진행돼 왔다”며 한미약품이 조직 개편과 인사에 대한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박 대표 강등 인사를 내린 것이라는 취지로 입장을 냈는데 이에 재반박한 것이다.
그동안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는 계열사인 한미약품의 인사·법무 등 업무를 대행하며 계열사로부터 일정 수준의 수수료를 받아 왔다. 박재현 대표는 인사·법무를 지주사로부터 독립화해 별도 조직을 신설해 이 구조를 손질하겠다는 방침이다.
창업자 일가의 경영권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핵심 계열사 한미약품의 조직 개편을 단행하는 이유를 묻자, 박 대표는 “올해 초부터 한미약품의 대표인 제가 검토하지 않고 발령하지도 않은 인사와 업무 이전이 이뤄졌다”며 “한미약품의 사내 인트라넷에서 인사 발령 내용이 (한미사이언스 측에 의해) 삭제되는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박 대표는 “한미사이언스 소속 일부 임직원들이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용한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며 “회사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불가피하게 법적 검토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는 그룹이 추구하는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과 독자 경영을 통한 기업 가치 제고 기조와 대치되는 문제이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조직 개편에 나선 것이라는 게 박 대표의 얘기다. 박 대표는 “독립 경영을 통해 한미약품의 가치를 더 높여 주주가치로 주주들께 보답하겠다’며 “이는 한미사언스 대주주 연합의 확고한 방침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임종훈 대표 측은 한미약품이 조직을 신설한 인사팀·법무팀에 배치된 임원들이 ‘외부 인사’라는 점도 문제 삼았다. 한미약품은 신설된 인사팀·법무팀에 이승엽 전무이사와 권순기 전무이사를 각 팀 리더로 선임했다. 임 대표 측은 권순기 전무가 자문사 라데팡스 출신으로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 대표는 “법무팀에 영입된 권 전무이사는 타 기업과 로펌 등에서 일한 20년 경력의 법조인으로, 해당 자문사와 큰 관련이 없다”며 “지난 2년 간 한미사이언스에 근무하면서 능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은 전문가인데, 외부 인사라는 일종의 프레임을 씌우며 선을 긋는 것은 권 전무에도 실례되는 표현”이라 말했다.
임종훈 대표가 박 대표에 전무 강등 인사를 예고했느냐는 물음에 “인사 발표가 난 밤 10시쯤 알았다”며 “당일 임종훈 대표를 비롯한 비롯한 임원진 회식이 있어 임 대표와도 함께 식사를 했었는데 회식이 끝나고 나서야 안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사이언스는 박재현 대표 강등 인사를 내고 박 대표의 시스템 접속도 막았다.
하지만 법조계와 한미약품에 따르면 이번 강등 인사는 효력이 없다. 법무법인 세종은 “상법과 근로기준법, 한미약품그룹의 법인 등기부등본, 정관 등에 따라 이번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의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이사 대상 직위 강등은 적법하지 않으며 효력이 없다”고 밝혔다.
법무법인 세종은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가 한미약품 대표이사를 해임하는 경우 주주총회 의결 등을 거치지 않고 단독으로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박재현 대표 강등 이후 시스템 접속 제한 행위를 한 것은 ‘위력’에 해당하고, 이로 인해 박재현 대표가 원활한 업무 진행에 차질을 빚게 됐다면 이는 업무방해죄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박 대표는 “제 발령에 관한 해프닝도, 회사의 모든 일을 오너가 독점해 결정할 수 있다는 좋지 않은 사례를 만든 것이라 안타깝다”며 “무엇보다 언론을 통해 사내 갈등이 있는 것처럼 표현되는 것이 그룹 임직원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하는 걱정이 가장 앞선다. 이 자리도 매우 조심스럽다”고 밝혔다.
한미사이언스 지분 절반가량을 확보한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과 한미약품그룹 창업자인 고(故) 임성기 선대 회장의 아내인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 장녀 임주현 한미약품그룹 부회장은 박재현 대표를 지지하고 있다. 3자 대주주 연합은 “한미약품의 독자 경영을 강력히 지지하며, 한미약품의 독자 경영 체제 강화를 위한 조직 신설은 정당한 조치였다는 인식을 함께 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