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KAIST 전자공학과 출신 공대생 다섯 명이 인공지능(AI)으로 매일 입을 옷을 골라주는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온라인으로 공개되는 패션 잡지를 ‘딥러닝’ 한 AI가 알아서 옷을 골라준다. 이들은 매일 아침 옷을 고르지 않아도 된다니, 참으로 기발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1년 만에 접어야 했다. 개인의 옷장 속을 파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공대생들에겐 옷을 고르는 게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의료 인공지능(AI) 솔루션 기업인 루닛(328130)을 창업한 백승욱(40) 의장의 실패 스토리다.
백 의장은 그 당시 자신을 “딥러닝에 빠져서 뭐든 시도해 보려는 공대생이었다”고 말했다. 백 의장의 첫 패션 사업은 망했지만, 두 번째로 도전한 루닛은 시총 1조 원이 넘는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첫 사업에 고배를 마신 백 의장은 의료로 눈을 돌렸다. 의약품과 의료기기는 임상 환자 데이터를 근거로 사용 허가를 받고, 건강보험 급여를 받는다. 의료에 데이터를 다루는 AI가 잘 쓰일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백 의장은 의료 영상으로 암을 판독하는 AI솔루션 루닛을 창업했고, 지난해 7월 상장에 성공했다. 루닛의 솔루션은 의료 AI와 관련한 국제 경진대회를 휩쓸었다. 루닛은 얼마 전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암 정복 프로젝트인 ‘캔서문샷’의 디지털 분과 프로그램인 캔서엑스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항암제 신약이 나오면 사람들은 신약의 우수성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사회는 신약의 혜택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려면, 비용을 낮춰야 한다. 기술이 진보하면 비용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 백 의장의 신념이다.
백 의장은 “지금 MRI를 한 번 찍는 데, 수백만 원이 들지만, AI로 판독을 수월하게 하면 그 비용이 몇십만 원대로 낮출 수 있다”며 “비용을 낮추면 더 많은 사람이 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암 정복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 의장은 지난 9일 서울 소공동에서 열린 ‘제11회 헬스케어이노베이션 포럼(HIF 2023)’ 기조 강연자로 참석했다. 강연을 마치자마자 행사장에 있던 기우성 셀트리온 부회장, 키메라항원수용체T세포(CAR-T) 치료의 대가인 박재홍 메모리얼 슬로언 캐터링(MSCK)암센터 교수가 백 의장을 찾아 면담을 요청했다. 다음은 백 의장과 일문일답.
-행사장에서 박재홍 MSCK 암센터 교수와 대화를 나누시는 걸 봤다. 어떤 얘기를 나눴나.
“박 교수가 카티 쪽도 AI로 바이오마커를 개발하는 것에 관심이 있냐고 질문을 했다. 암 정복을 주제로 포럼에 온 사람들은 생각이 다들 비슷하다고 느꼈다.”
-혈액암도 AI로 바이오마커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보시나. 루닛은 고형암 쪽으로만 AI를 개발해 온 것으로 안다.
“혈액암 바이오마커도 (우리가) 탐색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아직 시도해 보진 않았지만, 만나서 논의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카티에 바이오마커가 필요한지도 잘 몰랐다.”
-영역 확장이 가능한가.
“AI는 데이터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과거에는 영상 전문가 따로, 언어 전문가 따로 이렇게 구분했는데, 요즘은 하나의 방법론으로 모두 커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다양한 종류의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루닛이 MRI도 도전할 생각이라고 들었다. 루닛이 의료기기 업체가 될 수도 있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과 의료기기를 직접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미 MRI 촬영 시간을 AI로 단축하는 솔루션을 만드는 스타트업이 있다. 한국에도 에어스 메디컬이란 회사가 있다. GE헬스케어의 경우 MRI에 자체 개발한 AI를 탑재해 빠르고 속도와 정확도를 높였다. 현재 기술로 충분히 가능하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솔루션 회사다. MRI를 도입한 병원이 우리의 AI를 활용해서 비용을 낮춘다고 생각을 해 보자. 지금은 몸 전체 MRI를 찍으면 패키지로 400만~500만 원이 든다. 이 비용을 획기적으로 몇 십만 원 수준으로 낮춰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 후보물질 발굴은 어떤가. 구글딥마인드의 알파폴드, 엔비디아의 바이오니모 등 다양한 신약 발굴 AI가 나오고 있다.
“AI 기술을 신약 물질 발굴에 투입하면 신약 개발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동안 AI로 발굴한 후보물질이 임상 단계를 넘어 상업화되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AI 신약 개발 기업인 인실리코 메디슨이 최근 임상에까지 속도를 내고 있다.”
-그래서 직접 신약 개발에 나서겠다는 건가.
“여러 기업들과 협력하겠다는 뜻이다. 루닛의 바이오마커 기술과 합이 맞는 파이프라인이 있다면, 기술이전을 통해 루닛이 개발을 끌어가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신약을 개발할 때는 상업화 가능성이 있는 물질을 잘 선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물질이 있지만, 임상 비용이 없어서 큰 회사로 기술이전을 하는 혁신 바이오벤처들이 많다. 그런 회사들과 루닛이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0년 이내 매출 10조 원 매출 목표를 세웠다. 실현 가능한가.
“10년의 기간 안에 우선순위의 변화는 있겠지만, 충분히 해 낼 수 있다고 본다. 면역항암제 바이오마커 분야만 해도 10년 안에 세계 시장이 10조 달러 이상으로 커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항체약물접합체(ADC)도 바이오마커를 개발할 계획이고, 신약 개발 기업과 파트너십도 알아보고 있다. “
-파트너십을 얘기했는데, 인수합병(M&A)도 고려하고 있나.
“물론이다. 적극적으로 M&A도 해 나갈 계획이다. 그래서 요즘에 우리가 상장하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웃음)”
-의료 AI 규제 정책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현재 나오고 있는 AI 윤리는 헬스케어만 겨냥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 헬스케어 분야는 상업화가 되기까지 여러 윤리적 검토 작업을 거치기 때문에 오히려 당당하다. 다만 차별성이나 다양성 측면에서는 좀 더 고민할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차별성이라는 어떤 의미인가.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다. 그러다 보니 의료 AI를 활용할 때 소수 인종이 소외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소수인종에 대한 데이터가 적으니, AI의 학습량도 적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서양인과 비교하면 동양인과 흑인에 대한 정확도는 떨어질 수 있다. 루닛은 지금까지 동양인을 대상으로 데이터를 쌓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규제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미국 등에서는 이런 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어필하려고 한다. 실제 동양인은 치밀 유방이 많아서 유방암 판독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