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바이오 신약 개발과 투자가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국내외 바이오 벤처에 대한 독자 투자를 더는 하지 않기로 하면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주도하는 신약개발 로드맵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30일 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삼성의 바이오 투자 지형이 삼성바이오로직스 주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은 최근까지 사내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인 삼성벤처투자를 통해 바이오·의료 분야에 투자해 왔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지난 2021년 삼성물산과 함께 조성한 1500억원 규모의 ‘라이프사이언스(SVIC 54호 신기술투자조합)’ 펀드가 시작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도 올해 1월 ‘SVIC 63호 신기술투자조합’ 펀드에 198억원을 출자했다.
하지만 당초 삼성바이오에피스가 독자적으로 추진하던 바이오 벤처 투자 결정권이 삼성바이오로직스로 넘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은 지난 26일 조선비즈와 만난 자리에서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바이오벤처를 독자 투자하지 않고 있다”며 “국내외 바이오벤처 투자는 삼성벤처투자가 주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 사장은 이어 “우리는 벤처 투자에 주도권이 없다”며 “삼성의 바이오벤처 투자는 삼성성바이오로직스와 함께 한다”고 말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펀드 출범 당시 독자 투자 검토 계획을 밝혔는데, 그 계획을 접었다는 뜻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난 2017년에도 삼성벤처투자와 35억 원대 바이오벤처 투자 펀드를 조성했지만, 투자 없이 지난해 청산했다.
바이오벤처 투자에 이어 신약개발 주도권 역시 삼성바이오로직스 주도로 재편되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말 바이오를 제2의 반도체로 키우겠다고 선포하며 바이오 투자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도 지난 5월 미국 방문길에 글로벌 제약사 최고경영자(CEO) 5명을 만나면서 삼성이 조만간 신약개발에 도전할 것이란 공감대가 형성됐다.
애초 업계는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를 주력으로 연구 인력이 포진한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삼성의 신약개발을 주도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양질의 R&D 인력이 포진해 있어, 삼성이 신약개발에 도전한다면 삼성바이오에피스가 키를 쥐고 이끌어 갈 것으로 기대됐다.
실제로 고한승 사장은 미국 노스웨스턴대 유전공학박사 출신으로 로슈와 제넨텍 등 다국적 제약사에서 일한 영업·재무통인 존림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장보다 연구개발(R&D) 분야에 밝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여기에 고 사장은 지난 2011년 삼성전자 바이오사업팀으로 입사한 만큼 지난 2021년 합류한 존림 사장보다 삼성 근무 역사가 길다는 점도 주도권을 잡기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지난해 외부 인재를 공격적으로 영입하면서 이런 전망에 힘을 실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난해 1월 브리스톨마이어스큅(BMS) 수석 부사장 출신인 조호성 최고전략책임자(CSO), 유전자치료제 전문가로 알려진 이미미 부사장을 영입했다. 화이자 출신의 김윤철 개발담당 상무, 머크(MSD) 출신 김세훈 생산담당 상무도 비슷한 시기 합류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자회사로 편입된 이후부터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다. 유전자치료제 전문가인 이미미 부사장이 지난해 연말 돌연 퇴사했고, R&D 팀의 새 수장으로 지난 2010년 삼성종합기술원에 항체 개발 연구원으로 합류한 김경아 부사장이 선임됐다.
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R&D에 과감한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7월 차세대 바이오의약품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정남진 부사장을 영입했다. 정 부사장은 미국에서 28년간 유전학을 연구하고 머크와 애브비에서 신약개발에 참여했다. R&D 인력도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더 우세해졌다. 지난해 말 기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R&D인력은 608명, 삼성바이오에피스는 512명으로 뒤진다.
업계에선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신약개발의 주도권을 삼성바이오로직스로 넘겨주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에피스가 시밀러 개발을 하고 있지만, 신약을 개발하려면 역시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며 “에피스가 신약개발 분야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R&D 자체를 주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은 “항체 신약에서 에피스가 노하우가 있지만, 세포유전자치료제(CGT)나 항체약물접합체(ADC) 같은 차세대 의약품은 에피스의 주력 분야가 아니다”라며 “신약 분야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의사결정에 따라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최근 신약 기술에 적극 투자하면서 R&D 역량을 넓혀 가고 있는 것도 주도권을 갖고 가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