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사노피아벤티스 아태지역 항암 연구개발 총괄 상무였던 문한림 메디라마 대표(65)는 언론 인터뷰에서 “머지 않아 한국의 의료기관이 글로벌 항암제 임상시험을 주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상시험은 속도와 질이 생명인데, 국내 임상 연구기관의 의사들이 이런 조건을 다 갖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로부터 15여년이 지난 현재 한국은 명실상부 ‘글로벌 항암제 임상시험의 중심지’로 꼽힌다. 국내 진출 다국적 제약사의 단체인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에 따르면 지난해 다국적 제약사들이 한국에서 진행한 임상연구는 총 1590건, 임상 연구개발(R&D)비는 7153억원에 이른다.
미래를 족집게처럼 예언한 문 대표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먼디파마, 옥스온크 등 다국적 제약사의 연구개발 담당 임원을 거친 후 몇 곳의 바이오벤처를 창업했고, 지난 2020년에는 ‘위탁개발임상(CDRO)’기업인 메디라마를 세웠다. 메디라마의 사업모델은 국내외 바이오벤처가 개발한 신약 후보물질이 제 가치를 인정받아 비싼 값에 기술 이전할 수 있도록 임상 개발 전략을 세워 주는 역할이다.
신약 후보물질의 글로벌 경쟁력 파악부터, 인허가 및 임상 환자 모집과 같은 임상전략은 물론 미국 식품의약국(FDA) 미팅 및 국내외 허가 마케팅 전략까지 지원한다. 신약 후보물질이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 받아서 수출에 성공하려면 ‘속도’와 ‘매칭’이 중요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문 대표는 “귀한 자식(후보물질)을 좋은 집안에 시집⋅장가(기술이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메디라마는 전직원 20여명 남짓한 소규모 벤처인데, 의학박사(MD)만 4명이다. 문 대표는 “개발 과정에서 임상적 전문성이 필요한 바이오벤처에 MD파견을 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사명인 메디라마는 메디컬(Medical)의 ‘메디’와 파노라마(Panorama)의 ‘라마’를 합쳤다. 라마는 산스크리트어로 ‘도사님(Guru)’이라는 뜻도 있다. 의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고객사를 이끌어 가겠다는 것이다.
가톨릭 의대에서 혈액종양학을 전공한 문 대표는 ‘의사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가톨릭의대 정형외과 주임교수를 지냈고 어머니도 산부인과 의학박사다. 남편이 가톨릭의대 76학번 동기이고, 시아버지가 가톨릭의대 방사선과 교수를 지냈다. 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을 지낸 문정림 전 의원이 동생이다. 문 전 의원도 가톨릭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문 대표 남동생도 삼성서울병원 정형외과 교수로 있고, 문 대표의 자녀도 의대 재학 중이다.
메디라마는 바이오벤처 투자로 성공한 유한양행이 창업 초기부터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메디라마 사무실이 있는 곳도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본사 건물이다. 문 대표는 메디라마 창업에 앞서 2년 가량 유한양행을 컨설팅하기도 했다. 문 대표는 “K-바이오의 신약 개발 성공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다”라며 “바이오벤처가 본연의 역량인 훌륭한 물질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겠다”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一 메디라마의 주 업무는 무엇인가
“국내 바이오벤처의 신약 후보물질 임상 시험 전략에 대한 컨설팅이 주 업무다. 신약 후보물질 임상 돌입 10~12개월 전부터 전략을 짜게 된다. 임상에 들어간 이후에는 관리부터 국내 식약처, 해외 FDA 미팅 전략, 연구기관 선정까지 지원하기 때문에 ‘임상 개발’이라고 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신약 후보물질의 시장을 분석하고, 이 물질의 경쟁력을 매긴 후 , 이 물질을 가장 사 갈 만한 사람이나 기업을 찾아서 연결시키는 작업까지 한다고 보면 된다.”
一 중개 알선 서비스 같은 건가
“정확히는 컨설팅 지원이다. 후보물질이 혁신신약(first in class)는 아니지만, 신약(best in class)정도는 된다면, 관심을 가질만한 글로벌 제약사를 탐색하는 것이다. 비슷한 약을 팔고 있는데, 특허가 곧 만료되기 때문에, 신약이 급히 필요하다거나, 그런 경우에는 신약 후보물질을 찾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집안은 좀 어렵지만,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훤칠한 총각을 장가 보낼 적당히 좋은 집안을 찾아내는 작업과 비슷하다.(하하)”
一 적당한 집안을 어떻게 찾나. 비결이 있나.
“항암제를 개발할 때는 ‘타기팅 어프로치(표적 접근)’를 한다. 몸 속에 암세포가 있는 지점에 치료제를 가까이 접근시켜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전략이다.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약물과, 이 약물을 지점까지 도달시키는 플랫폼 기술을 구분하고, 항암제를 개발하는 주요 제약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우리가 가진 물질이 이런 역할에 이런 효과가 있는데, 혹시 관심이 있느냐’ 의향을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나.
“예를 들어 신약 후보 물질이 폐암에 효과적이라면 기존에 폐암 항암제를 팔고 있는 회사를 보게 된다. 해당 약의 특허가 끝나면 후속 신약이 필요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기존의 항암제와 함께 써서 더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一 그런 트렌드를 어떻게 다 따라잡을 수 있나.
“쉽지 않다. 지난 2021년 미국 FDA에서 승인을 받은 항암제가 62개쯤 된다. 1년이 52주라고 보면 한 주에 한두개는 승인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 중에서 19개는 혁신 신약이었고, 나머지 43개는 적응증이 추가된 것이다. 적응증이 추가됐다는 건, 이미 허가를 받은 약인데, 다른 질환에도 쓸 수 있게 허가를 받았단 뜻이다. 이번 주에 위암 치료제가 승인을 받으면 다음 주는 폐암, 그 다음주는 두경부암 치료제가 승인을 받는 식이다. 새로운 승인이 나올 때마다 우리 전략에 차질이 없는지 계속 확인하는 작업을 해줘야 한다. 세세한 것까지 설명하기엔 한계가 좀 있다.”
一 확인 작업이 많이 어려운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먼저 신약 개발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최초의 PD-1 면역관문억제제인 옵디보는 미 FDA 승인을 받는 데 8년이 걸렸지만, 면역항암제인 키트루다는 3년 10개월 만에 FDA 승인을 받았다. 눈이 핑핑 돌아간다.”
一 혹시 FDA도 승인에 일종의 유행이나 패턴이 있나.
“있다. FDA가 몇 년 동안 특정 분야에 가속 승인(정식 품목 허가를 받기 전에 미리 승인을 내 주는 것)을 해 주다가 갑자기 승인을 안하고 멈추는 경우가 있다. 이를 두고 ‘학습커브(learning curve)’라고 부른다. FDA가 해당 질환 혹은 분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해서, 신약 승인 전략을 수정하는 과정이다. 규제 당국도 공부를 해야 하니까 이런 패턴이 생긴다. 임상 전략을 짤 때는 이런 과정들을 모두 꿰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를 찾아오는 국내 바이오벤처 중에서는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꿴 경우도 있다.”
一 어떤 경우인가.
“글로벌 블록버스터 항암제 중에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한 ‘타그리소’가 있다. 3세대 비소세포폐암 표적 항암제로, 연매출이 43억 달러(약 5조 1000억원)에 이른다. 이 약은 암세포 가운데 ‘EGFR(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 T790M 변이’를 타깃으로 한다. 지금 의료계에선 T790M 변이 환자에겐 이 약을 쓰는 게 정답처럼 자리 잡았다. 그런데 T790M 변이를 잡는 후보물질을 10년째 붙잡고 있는 국내 벤처가 있었다.”
一 그 바이오벤처의 후보물질이 T790M 변이를 더 효과적으로 잡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게 아니다. 내가 그 대표에게 ‘T790M 변이는 이제 없어집니다’라고 했다. 전세계 T790M변이가 있는 비소폐암 환자들은 모두 타그리소로 치료를 받고 있다. 이렇게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있으면, 오히려 또 다른 변이가 나타나게 된다. 그 새로운 변이를 타깃해야 한다.”
一 이런 일은 왜 발생하나.
“기초과학을 하다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연구를 계속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자기 후보물질과 사랑에 빠진 경우다. 내 자식이 너무 예뻐서 하버드를 갈 것 같지만, 그게 희망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않나. 희망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희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一 그렇다면 국내 바이오벤처 중에 유망한 곳이 있나
“플랫폼 기술을 가진 회사를 가장 유망하다고 본다. 좋은 플랫폼 기술이 있으면, 약을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되니까 척척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과학(사이언스)도 중요하지만, 사업 센스도 중요하다. 빠르게 전략을 바꿀 수 있는 유연성도 중요하다.”
一 혹시 예를 들어줄 수 있나.
“레고켐이나 인투셀처럼 ADC 기술이 굉장히 좋은 바이오벤처, 유틸렉스처럼 면역항암제를 잘 한다거나, 세포치료제 기술에 특화된 곳도 있을 수 있다.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의 사업구조도 독특하다. 후보물질을 정말 잘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바이오벤처라고 생각한다. 인터루킨2를 기반으로 하는 지아이이노베이션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一 하지만 정작 K-바이오의 기술 이전 성과는 잘 나지 않는 것 같다.
“국내 바이오벤처들이 전임상까지는 잘 하는데, 임상에 들어가면 헤맨다. 잘 몰라서 그렇다. 또 FDA나 식약처, 특히 항암제 분야 규제 당국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속도가 중요한데, 법제가 자주 바뀌니까 소규모 바이오벤처들이 이런 과정을 속속들이 다 알기가 어렵다. 거기에 항암제는 ‘생존기간’이 중요해서 아무리 짧아도 8~12개월이 걸리는데, 약의 독성과 약의 용량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또 시간이 지연된다.”
一 임상에서 약의 용량을 확인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용량 최적화(dose-optimisation)라는 과정이 있다. 약의 독성(부작용)과, 약의 효과를 감안해 환자에게 투여했을 때 가장 최적의 용량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과거에는 임상 1상에서 용량을 높인 다음 임상 2상에 돌입했는데, 얼마 전 FDA가 2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용량 최적화를 다시 요구하면서 36개월이면 끝날 임상이 48개월로 늘어졌다. 이런 것에 끊임없이 대응해야 한다.”
一 이런 대응 과정에서 메디라마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 물질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다. 비임상에서 기술 이전과 임상에서 기술 이전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가치가 확 달라진다. 신약 후보물질을 기술 이전할 때는 단계적으로 계약을 한다. 초기 계약금(업프론트)을 일정 부분 받고, 마지막에 이 물질이 미국 FDA 승인을 받아 출시에 성공하면 받을 수 있는 과정까지 성공 보수를 계약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물질이 최종 성공했을 때 받을 보수가 1조 원이라고 가정하면, 비임상 과정의 후보물질은 업프론트(초기 계약금)를 전체 보수의 1% 즉 100억원 밖에 받지 못한다. 하지만 임상 1상이라도 들어가서 기술 이전을 하면 업프론트를 5~10배는 더 많은 500억~ 1000억 원까지 받을 수 있다.”
一 국내 대학병원의 항암제 임상은 세계 최고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한국 바이오벤처에도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글로벌 제약사 임상도 한국에서 한다. 그리고 교수님들이 워낙 많은 임상을 하기 때문에 경쟁도 치열하다. 우리 물질이 임상을 더 빨리 잘 받아 내려면, 경쟁 약물보다 임상하는 연구진의 머리 속에 각인이 돼 있어야 한다. 연구자들이 임상 참여 환자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게 독려하는 작업도 다 포함이 돼 있다. 과학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태도적인 부분도 모두 중요하다. "
一 1998년 한국 나이로는 41살에 대학을 박차고 나왔다. 계기가 있었나.
“정부 정책이 움직이는 속도를 시간당 20~30㎞라면, 학교는 시간당 40~50㎞, 산업계는 80~100㎞라는 말이 있다. 그 당시에 속도감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착하고 일 잘하는 후배’라는 립 서비스만 듣던 내 능력이, 사회로 나왔더니 업무 능력으로 인정받았다. 그 점이 좋았다.”
一글로벌 빅파마에서 퇴직한 후, 국내 대기업에서는 러브콜이 없었나.
“수십년을 회사에서 고용돼 일을 했으니, 이제 내가 좀 독립적인 일을 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一 벤처 창업을 준비하는 의사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외부 강연을 가면 ‘의사는 사회적 스킬이 꽝이다’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사회적 스킬에는 리더십, 팀워크,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 여러가지가 있다. 병원 밖으로 나온 의사들에게 의도적으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一 그 이유가 있나.
“의대에서 6년 쯤 공부를 하는데, 그 때는 공부에 치여서 친구를 만날 시간도 신문 볼 시간도 없다. 공부 말고는 학과 선후배 교수님 밖에 없다. 병원에 가면 상황이 더 심해진다. 의사들은 지시를 내리는 역할이다. 간호사나 환자 보호자 대부분 자기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적 능력을 키울 유인이 없다. 하지만 산업계는 전혀 환경이 다르지 않나. 환자를 돌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더 많은 의사 과학자들이 산업계로 나와서 산업 발전에 기여해 주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