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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안암병원과 삼성서울병원 연구팀이 미국립보건원(NIH) 산하 미국립정신보건원(NIMH)이 추진하는 대규모 동양인의 조울증(양극성 장애) 유전자 분석 프로젝트에 공식 참여한다. 아시아에서 이처럼 정신질환과 관련해 대규모 유전체 연구를 시도하는 것은 처음이다. 동양인은 물론 조울증의 발병 원인을 규명하고 환자 진단과 치료에 새로운 실마리에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헌정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백지현 삼성서울병원 교수는 29일 NIMH가 지원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브로드연구소가 주도하는 ‘아시아 양극성 유전학 네트워크(A-BIG-NET)’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과 인도, 대만, 싱가포르, 파키스탄 등 5개국 조울증 환자와 일반인 게놈(유전체)를 분석해 동양인의 조울증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MIT브로드연구소를 주축으로 미국 하버드대 의대, 존스홉킨스대 의대를 비롯해 아시아에서 고려대와 인도국립정신건강신경과학연구소, 인도과학연구소, 싱가포르정신건강연구소, 국립대만대 등 아시아의 5개 연구 기관이 참여한다. 한국에선 고려대를 주축으로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울산대 등 40여개 기관이 참여하며 이 교수가 국내 연구 책임자를 맡았다.

국제 공동 연구진은 앞으로 5년간 동양인 조울증 환자 2만 7500명과 정상인 1만 5000명의 유전체는 물론 경제, 사회적 환경을 함께 분석해 유전적 원인과 함께 사회적 원인도 함께 찾게 된다. 연구진은 MIT 브로드연구소가 개발한 ‘유전체-엑솜 혼합(BGE)’ 기술을 활용해 유전체 분석을 하게 된다. 이 기술은 사람의 DNA에서 유전 정보가 있는 부분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훑고 지나가는 원리다. 대규모 유전체 정보에서 유전자 변이를 찾는 데 적합한 기술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헌정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고려대의료원

정신질환 분야에서 이 정도 규모의 유전체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는 사실상 처음이다. 지난 2020년 동아시아인 43만명을 대상으로 당뇨병을 일으키는 유전체 연구가 진행된 적이 있지만, 정신질환 관련 유전체를 연구 사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정신질환 유전체 연구는 지금까지 대부분 유럽계 백인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정신질환 유전체 연구 사례는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 정신질환 관련 유전자는 인종에 따라 다를 수 있어 보편적인 원인을 밝히려면 여러 인종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이 교수는 “최근 학계에선 백인 위주의 대규모 연구를 해도 전세계 인구 60%를 차지하는 아시아인에 대한 비교하지 않으면 연구에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며 “다인종 연구를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지역의 대규모 연구에 많은 연구비가 투자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백인을 대상으로 정신질환의 원인을 찾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지만, 이 연구를 바탕으로 개발된 치료제는 없다. 하지만 정신질환의 원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정신질환 환자를 진단하는 데 2시간 이상 걸리고,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진단도 달라지기 때문에 일관된 결과를 내기도 어렵다.

국내에선 서울대 병원이 이와 별도로 지난 11일 NIMH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 여성 1만 명을 대상으로 우울증 유전체 연구를 추진한다. 이 교수는 “정확한 진단과 정신건강 관리를 위해서는 개관적 증상을 평가하는 것과 함께 유전체 연구가 필요하다”며 “이번 연구를 통해 조울증의 원인을 규명하고 진단과 치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