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으로 치달았던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갈등이 일단락된 모양새다. 두 사람의 갈등설이 불거진 지 단 이틀 만에 ‘화해 무드(mood)’가 형성된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예상보다 빠른 수습 국면에 박근혜 정부 당시 ‘진박 공천’으로 터진 당 내홍으로 졌던 ‘2016년 총선 패배 악몽’ 되풀이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77일밖에 남지 않은 총선에서 지는 순간 정부·여당은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당내 시그널을 두 사람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24일 정치권에 따르면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전날 극적으로 화해에 나섰다. 대형 화재가 발생한 충남 서천수산물특화시장을 방문한 두 사람은 현장을 함께 둘러봤다. 이 과정에서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를 했고, 윤 대통령도 한 위원장과 악수를 하면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감싸 안는 등 친근감을 표했다.
앞서 지난 21일 발생한 갈등설의 표면적 원인은 한 위원장의 ‘사천(私薦)’ 논란이었다. 논란은 한 위원장이 당내 절차 없이 김경율 비상대책위원의 서울 마포을 출마를 밝히면서 촉발됐다. 이에 한 위원장은 김 비대위원 관련 발표를 앞두고 윤재옥 원내대표를 포함해 원내 지도부와 상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사천이 아니었다고 선을 그은 셈이다.
그러나 갈등의 실질적 원인은 윤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논란 해법에 대한 한 위원장과 대통령실 간 온도 차와 이에 대한 신뢰 문제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한 위원장의 영입 인사이기도 한 김 비대위원이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해 프랑스 혁명 당시 처형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언급했고, 한 위원장도 이와 관련해 “국민들이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민후사”를 거론했다. 정치권에서는 윤 대통령의 경고가 이뤄졌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대통령실에서 ‘사퇴 요구’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 간 갈등은 더욱 확전됐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날 서천 화재 현장을 함께 방문한 뒤 같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허심탄회하게 속사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한 위원장은 서울역에서 기자들과 만나 두 사람의 갈등 봉합에 대해 “대통령님에 대해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을 갖고 있다. 대통령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민생을 챙기고 국민과 이 나라를 잘 되게 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첨예했던 갈등을 예상보다 빠르게 봉합한 배경으로는 2016년 박근혜 정부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대표의 ‘옥새 파동’ 사태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당내 우려를 인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는 여당 후보 선정에 관여해 이른바 ‘진박 공천’을 추진하고자 했다가 총선을 3주 앞두고 김 대표가 일부 공천장 직인 날인을 거부한 이른바 ‘옥새 파동’이 발생했다. 그 결과, 집권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어 원내 제2당이 됐고, 최대 승부처였던 수도권 122석 중 35석(28.7%)만 얻는 참패를 겪었다. 여권 내부의 권력 다툼이 곧 총선 패배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영남권 한 의원은 통화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이번에 수습이 돼서 정말 다행”이라며 “안 그랬으면 박근혜 정부 당시 악몽을 다시 되풀이할 뻔했다. 공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 전부터 굳이 갈등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당 관계자는 “우리는 이미 당정 간 갈등, 계파 다툼으로 인한 공천 파동이 어디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우리 당 출신이라면 DNA가 새겨진 것처럼 ‘2016년 총선 패배’라는 공통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는 말”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대통령실과 봉합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갈등은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 두 사람의 갈등 봉합이 완전한 상태로 이뤄진 건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김 여사 리스크’를 제대로 털고 가지 않는 이상 국민의힘은 총선에서 해당 이슈로 야당 공세를 받을 수밖에 없고, 국민의 지지도 일부 떨어져나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4·10 총선까지 77일만을 남긴 상태에서 정치적 결별을 선언하는 것보다 ‘한동훈 비대위’로 총선을 치르는 게 더 이득이라는 정치적 셈법에 따라 일단 갈등부터 봉합했다는 해석이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한 달 간 당 대표급 지위인 비대위원장을 하면서 한동훈 위원장이 ‘김건희 리스크’를 해소하지 않으면 총선을 이기기 어렵다고 본 것 같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윤 대통령을 설득하지 못하면서 갈등이 불거진 것”이라며 “윤석열 대통령과 인간적 결별은 하더라도 정치적 결별은 곧 총선 패배와 직결되니 잠시 갈등을 보류한 것뿐이고, 결국 서로 한 발씩 물러났다고 보는 게 맞는다”라고 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두 사람의 관계 회복이 마치 ‘짜고 친 고스톱’처럼 보이지만, 한 위원장은 국민에게 제대로 어필했다. 국민 눈높이에 맞춰서 ‘김건희 여사 논란’을 보겠다고 했고, 집권 여당 비대위원장으로서 대통령에게도 쓴소리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라며 “공천에서도 이런 기조를 유지한다면 공천 파동 없이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선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총선까지 77일밖에 안 남았지만, 김 여사 리스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당 입장이 어떠냐에 따라 국민들 지지가 달라질 수 있다”며 “지금 윤 대통령도 한 위원장 등판 이후 ‘정권 심판론’이 옅어진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럴 때 김 여사 리스크를 제때 잘 풀어서 국민적 지지를 받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다.
이어 신 교수는 “김 여사 리스크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마냥 악재가 될 수도 있고, 호재가 될 수도 있다”며 “최선의 방법은 본격적인 총선에서 야당 공세를 받지 않도록 합리적인 안으로 반드시 해결하고 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