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그래픽=손민균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을 찾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회동을 앞둔 가운데 세계적인 메모리 반도체 부족으로 '슈퍼을(乙)'이 된 삼성전자가 AMD를 상대로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가 AMD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기 위해 구애하는 처지였다면,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오히려 AMD가 첨단 메모리를 수급하기 위해 업계 최대 수준의 생산능력을 갖춘 삼성전자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다.

18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두 회사는 차세대 인공지능(AI) 메모리, 컴퓨팅 기술 분야 협력을 확대하는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날 수 CEO는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과 평택 캠퍼스에서 만나 구체적 협업 사항을 논의했다. 구체적 내용은 명시돼 있지 않지만 삼성전자가 AMD에 최첨단 HBM 공급 물량을 늘리는 대가로 AMD의 첨단 AI 칩을 삼성 파운드리에서 일정 부분 생산하는 조건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 리사 수 찾아오게 만든 반도체 지형 변동

수 CEO는 지난 2014년 AMD 수장에 오르며 당시 무너져 가던 AMD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로로 장기 집권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서버, PC 중심의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이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위주로 급변하면서 AMD 역시 AI 반도체가 최대 매출처이자 미래 성장 동력이 됐다. 현재 AMD는 엔비디아를 위협할 수 있는 현실적인 '2위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만 앞으로의 과제가 산적하다.

우선 엔비디아와의 성능 격차를 줄이기 위해 AI 반도체 설계 역량뿐 아니라 공급망을 강화해 체급을 키워야 한다. 다만 현재 상황은 부정적인 견해가 더 많다. 올해 1분기 AMD의 실적 전망치는 98억달러(14조5598억원)로 전 분기 대비 5% 감소가 예상된다. 해당 발표 이후 로이터를 비롯한 주요 외신은 매출 성장에도 불구하고 AI 반도체 사업의 질적 수준과 수익률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AMD는 AI 반도체 사업의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 모두가 절실한 상황이다. AI 반도체 업계에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엔비디아를 추격해야 하는 동시에 브로드컴 등 맞춤형 반도체(ASIC) 설계 업체들의 부상으로 위협 받고 있다. AMD 입장에선 오픈AI를 비롯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에 더 뛰어난 성능의 칩을 대량으로 공급해야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업계에선 AMD의 MI 시리즈 AI 반도체가 어느 정도 성능을 확보했지만,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엔비디아에 열세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만 AI 칩 성능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HBM 수급이 좀처럼 쉽지 않다. '큰손'인 엔비디아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최첨단 HBM 생산 물량 상당 부분을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수 CEO가 삼성전자를 직접 찾아온 이유도 업계에서 가장 높은 성능의 HBM을 가장 많이 공급해줄 수 있는 기업이 삼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AMD의 주력 AI 칩인 'MI400'에 탑재할 6세대 HBM(HBM4) 분야에서 삼성전자는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다. 특히 삼성전자는 HBM4 성능을 표준치 이상으로 끌어올려 경쟁사보다 최대 성능이 앞선다.

◇ TSMC 충성 고객 AMD, 삼성 파운드리와 협업 늘린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삼성전자

삼성전자는 AMD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쥐고 있는 패가 더 많다. 업계 최대 구매자인 엔비디아가 이미 대규모 납품을 요청하고 있으며 브로드컴 등도 미국 빅테크의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HBM과 고성능 서버용 D램 구매를 지속적으로 늘려나가는 추세다. AMD 외에도 프리미엄을 얹어서라도 칩을 구매한다는 대형 고객사가 줄을 선 셈이다. 삼성 안팎에서는 결국 삼성전자가 HBM을 무기로 수 CEO와의 협상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은 HBM 고객사를 늘리는 한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 경쟁사인 대만 TSMC에 대한 추격의 고삐를 당길 수 있게 됐다. AMD는 TSMC의 가장 충성스러운 고객사 중 하나로 꼽힌다. 올해 초 기준 AMD는 7나노 이하 첨단 공정 칩 전량을 TSMC를 통해 생산하고 있다고 공시한 바 있다. 퀄컴이나 엔비디아는 TSMC 외에도 삼성전자 등에 주력 칩을 위탁생산한 바 있지만, AMD는 사실상 절대 다수의 칩을 TSMC를 중심으로 생산해왔다. 일부 구형 공정 칩도 미국 글로벌파운드리(GF)를 보조로 사용했으며, 삼성과는 의미 있는 협업이 사실상 없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MD와 삼성 파운드리의 협력은 메모리 공급 부족 조짐이 보이던 지난해부터 꾸준히 거론되어 온 시나리오 중 하나이며, 실제 실무진 사이에서는 논의가 오가고 있다"며 "이재용 회장과 리사 수 CEO의 이번 회동을 통해 양사의 반도체 위탁 생산 파트너십이 더 힘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