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인천 송도에 위치한 연세대 국제캠퍼스 양자클러스터 내 양자컴퓨팅센터. 이달 개소해 널찍한 공간 한가운데 2.7m 높이의 원통형 기계가 유리로 만든 관 안에 들어서 있었다. 얼핏 보면 건물의 구조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IBM의 ‘퀀텀 시스템 원’이라는 양자컴퓨터다. 퀀텀 시스템 원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 세계에선 미국, 독일, 일본, 캐나다에 이어 5번째다.
퀀텀 시스템 원은 영하 273도 유리 관 안에 세 개의 알루미늄 실린더가 양자 프로세서(QPU)를 감싸고 있는 구조다. 열·전자파에 민감해 쉽게 손상되는 프로세서 내 양자의 운동량을 극저온으로 제한하기 위함이다. 퀀텀 시스템 원은 다소 단순한 구조지만 전작 대비 작업 속도를 50배나 높인 IBM의 야심작이다. 100시간이 걸려 진행 할 연구를 2시간 만에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양자컴퓨터는 신호를 0과 1단위로 나눠 처리하는 일반 컴퓨터와 달리, 0과 1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일반 컴퓨터에 비해 연산 속도가 월등히 빠르다. 일반 컴퓨터가 몇 백만년이 걸릴 계산을 양자 컴퓨터가 몇 분 만에 처리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퀀텀 시스템 원은 127큐비트(양자컴퓨터 연산 단위) 속도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퀀텀 이글 프로세서’ 칩이 장착돼 있다. 127큐비트는 일반 컴퓨터에 비해 ‘2의 127승’배 연산 범위가 넓다는 의미다.
연세대는 2021년 IBM과 계약을 맺고 양자컴퓨터 도입을 추진했다. 올 6월에는 양자컴퓨터 활용 분야에 대해 IBM과 ‘퀀텀-바이오 이니셔티브’에 합의하고 바이오 산업을 집중 지원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이뤄질 주력 연구인 신약 개발은 생명체의 단백질 구조 파악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백질 구조를 파악해야 질병의 원인 발생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얻고,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단백질을 결합해 신약 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 있다.
기존에는 단백질 구조를 사람이 현미경으로 직접 파악해야 했는데, 생김새가 복잡해 2020년까지 전체 대비 0.1%에 불과한 20만개만 발견된 것으로 파악됐다. 인공지능(AI)이 단백질 구조를 연산 작업을 통해 파악한 뒤 현재는 2억개에 달하는 단백질 구조 분석에 성공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때문에 제약 분야에서도 AI의 고성능 연산 작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가 중요해지고 있다.
정재호 연세대 양자사업단장은 “대부분의 산업은 연구개발(R&D)로 제품의 품질은 높아지면서 비용은 낮아지지만, 바이오 산업에서는 오히려 기술 수준이 높아질수록 가격이 오르는 ‘R&D 패러독스’가 나타난다”며 “양자컴퓨터를 이용하면 신약 개발에 드는 비용을 10분의 1, 100분의 1로 낮춰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의 양자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한국 시장을 개척하고 싶어 하는 IBM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졌다. 연세대와 IBM은 지난 7월 국내 양자 생태계 발전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연세대 국제캠퍼스에 퀀텀 시스템 원이 들어서게 됐다. 그간 국내 기업은 양자컴퓨터를 사용하려고 해도 비싼 비용을 내고 해외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는 다양한 산업군에 속해 있는 국내 기업과 손잡고 저렴한 가격으로 양자컴퓨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다.
시장조사업체 IDC는 30여개 양자컴퓨터 기업을 대상으로 한 평가에서 IBM에 가장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IBM은 2016년 전 세계 최초로 클라우드를 통해 일반인들도 양자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공개했다. IBM은 2017년 퀴스킷(Qiskit)이라는 양자컴퓨터를 위한 핵심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구축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양자 프로그래밍 도구가 됐다.
IBM은 연세대를 시작으로 국내 IT 기업인 한국퀀텀컴퓨팅(KQC)과 협력해 2028년 내 양자컴퓨터를 부산에도 설치할 계획이다.
정 단장은 “양자컴퓨팅 분야는 2030년까지 55억달러(약 7조6697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국내 최초로 도입된 양자컴퓨터의 공동 활용 생태계 구축을 통해 산업 전반의 ‘양자 문해력’을 증진하고 상생 협력의 기반을 제공하려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