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낸드플래시 제조업체 키옥시아가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 하락 여파로 다음 달로 예정됐던 도쿄증권거래소 상장 계획을 철회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어 세계 3위 낸드 업체인 키옥시아는 상장으로 확보한 자금을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로 쓸 계획이었다. 주요 투자자 중 한 곳인 SK 하이닉스의 투자금 회수도 현재로서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키옥시아의 상장 무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키옥시아는 2020년에도 기업공개(IPO)를 계획했으나, 미중 갈등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상장 일정을 미뤘다. 2021년에도 상장을 시도했지만, 낸드 공급과잉에 따른 가격 급락으로 업황이 악화하면서 계획을 취소한 바 있다. 미국 웨스턴디지털과 합병으로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려 했으나 이 또한 무산됐다.
◇ 메모리 기업 주가 곤두박질… ”키옥시아, 제값 받기 힘들다”
25일 로이터와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올해 일본 기업공개(IPO) 시장 최대어로 꼽혀온 키옥시아가 내달로 예정된 상장을 보류했다. 키옥시아는 당초 시장가치 1조5000억엔(약 13조원)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가치가 이보다 낮게 평가될 것으로 예상되자 IPO 계획을 미룬 것이다. 보통 상장 예정 기업은 비교기업군의 기업가치를 토대로 공모가를 정한다. 상장 예정 기업의 순이익에 비교기업군의 평균 주가수익비율(PER·시가총액 ÷ 순이익)을 곱하는 식이다.
문제는 최근 메모리 제조사들의 주가가 곤두박질쳤다는 점이다. 이날 기준 삼성전자의 주가는 올해 최고점(8만7800원) 대비 약 29% 떨어졌고, SK하이닉스 또한 올해 주가가 24만1000원을 찍은 뒤 약 31% 급락했다. 미국 마이크론 주가 역시 올 최고점(153.45달러)에서 약 39% 하락한 상태다. 이들 종목의 기업가치가 쪼그라든 만큼 키옥시아도 기대하던 수준의 기업가치를 인정받기가 어려워졌다. 키옥시아는 이날 “적절한 시기에 상장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키옥시아의 상장 보류는 SK하이닉스에도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2018년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이 주도하는 한미일 컨소시엄에 참여해 약 4조원을 투자했다. SK하이닉스의 투자 목표는 키옥시아 상장 이후 투자 지분을 매각해 투자금 이상을 회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SK하이닉스의 키옥시아 투자 성과는 아직까지 마이너스 수준이다. 낸드 업황 악화로 SK하이닉스의 키옥시아 투자자산은 2022년 1조882억원 손실에 이어 작년 평가손실이 1조6559억원으로 불어났다.
◇ AI 메모리 붐에 투자 재원 마련 혈안
AI 메모리 붐으로 메모리 제조사들은 설비투자를 위한 실탄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키옥시아의 상장이 또 다시 연기되자 SK하이닉스의 투자금 회수 시기 역시 불투명해졌다. SK하이닉스는 올 2분기 말 기준으로 현금성 자산 9조6881억원을 보유하고 있다. 전년보다 29.3% 증가한 수치지만, 경쟁사인 삼성전자는 100조원이 넘는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향후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기업용 SSD(eSSD) 등 고부가 AI 메모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투자금이 필요하다.
업계에서는 일본 IPO 시장이 탄탄한 만큼 키옥시아가 조만간 상장을 재추진할 것으로 보고 있다. 키옥시아가 상장하면 도시바와 베인캐피털은 보유 주식을 단계적으로 매각할 것으로 관측된다. 컨소시엄이 주식을 매각하면 SK하이닉스도 지분 일부를 처분해 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자회사 솔리다임을 미국 증시에 상장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업계가 예상하는 솔리다임의 상장 시점은 내년 하반기다. 솔리다임은 지난 2022~2023년 누적 적자가 7조원에 달했으나, 올 2분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특히 eSSD 부문에서 선전하고 있는 솔리다임은 턴어라운드에 성공한 올해 상장을 적극 추진해 최대한 많은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HBM, D램, eSSD 등 AI 수요와 함께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메모리 수요처에 잘 대응하고 있지만, ‘규모의 경제’를 만들기 위한 추가 투자가 절실하다”면서 “평택 공장 부지에 여유가 있는 삼성전자와 해외 투자를 광범위하게 단행하고 있는 마이크론과의 생산능력 경쟁을 위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