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이크론이 지난달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양산을 공식화하며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의 시장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정상 작동하는 합격 제품의 비율을 의미하는 생산 수율이 관건으로 떠올랐다. HBM(High Bandwidth Memory)은 고성능 인공지능(AI)을 구동하는 핵심 메모리 반도체로 일반 D램 제품을 여러 개 적층하는 첨단 설계를 사용한다.
HBM3(4세대 HBM)의 경우 기술력이 가장 앞선 SK하이닉스의 수율도 60~70%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 D램 대비 20~30%포인트(P)가량 낮은 수준이다. HBM3E의 공정 난이도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제조에 직접 투입되는 첨단 장비뿐만 아니라 제조 과정에서 불량 여부를 판단하고, 웨이퍼의 이상 유무를 측정하는 장비도 중요해지고 있다. 국내 반도체 장비 회사들은 HBM 생산에 필요한 검사장비 등을 중심으로 AI 반도체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 HBM 제조 난이도 높아 결함↑… 검사장비·신뢰성 평가 수요 커져
1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인 HBM3E의 생산 경쟁이 시작되면서 검사장비와 신뢰성 평가 등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장비사인 펨트론과 고영테크놀러지, 오로스테크놀로지 등은 국내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자사 제품 공급을 준비 중이다.
HBM3E는 D램을 8단으로, 혹은 HBM3(4세대 HBM)에 4단을 추가로 더 적층한 12단 구조의 차세대 HBM을 말한다. HBM은 메모리 칩을 수직으로 쌓고 적층된 칩 사이에 전기적 신호가 전달되게 하는 실리콘관통전극(TSV) 공정이 적용되는데, 이 과정에서 반도체 웨이퍼가 휘어지는 등 결함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HBM 세대가 진화할수록 단수가 높아져 이 같은 현상이 심화된다.
펨트론은 SK하이닉스와 함께 HBM 웨이퍼와 TSV 공정 등 검사장비의 성능 평가를 진행 중이다. 이르면 올해부터 본격 양산에 나설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SK하이닉스는 HBM 생산성 향상을 위해 어드밴스드(Advanced) 매스리플로우-몰디드언더필(MR-MUF)을 도입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펨트론은 이 공정에 필요한 검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MR-MUF는 쌓아 올린 칩 사이에 보호재를 넣은 후 전체를 한 번에 굳히는 공정으로 기존 공정과 비교할 때 방열 효과가 뛰어나다. SK하이닉스에 따르면 MR-MUF 공정 도입 시 기존 공정 대비 열 방출이 36% 수준으로 개선될 뿐만 아니라 생산성이 3배 이상 향상된다.
◇ 삼성전자·SK하이닉스, 장비 국산화 추진에 관련 기업 수혜
신뢰성 평가란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제품의 수명과 성능을 검증하는 과정을 말한다. 전수검사는 아니지만 많은 표본을 테스트해 신뢰성을 검증하기 때문에 차세대 반도체가 개발되면 수요도 커진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HBM의 신뢰성 평가 의뢰가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업계는 파악하고 있다. 올 하반기부터는 HBM3E의 다음 세대 제품인 HBM4(6세대 HBM)의 신뢰성 검사 물량도 늘 것으로 보인다.
큐알티(QRT)의 경우 주요 고객사인 SK하이닉스의 HBM3E 제품 양산이 다가오면서 실적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큐알티는 반도체 업황 부진에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93% 감소한 7억원에 그쳤다. 양승수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작년 기준 전체 매출의 58%을 차지하는 주력 고객사인 SK하이닉스향 신뢰성 평가 매출이 본격화돼 실적이 우상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고영테크놀러지는 웨이퍼 레벨 패키징(WLP)에 특화된 제품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제품 신뢰성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WLP는 차세대 패키징 기술인 어드밴스드 패키징(AVP) 공정에서 불량품을 검사해 생산 수율 향상을 돕는다. AVP는 이미 만들어진 반도체 칩을 쌓고 연결해 최종 형태의 반도체 칩 성능과 기능을 최적화하는 공정으로 HBM 등 차세대 AI 반도체를 제조하는 데 쓰인다.
오로스테크놀로지는 미국 KLA와 네덜란드 ASML이 과점하던 웨이퍼의 회로 패턴 정렬 상태를 측정하는 계측장비 국산화에 성공했고, 인텍플러스도 HBM 외관 검사장비 연내 양산을 목표로 고객사와 품질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검사장비와 신뢰성 평가 등에 대한 수요 증가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장비 국산화를 추진하면서 국내 반도체 장비 업계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해외 기업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에서 문제 대응·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수림 DS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에서 공급망을 다변화하기 위해 테스트 일부 단계에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어 국내 검사장비 업체의 수혜가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