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對中) 첨단 반도체 규제가 심화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팹(공장) 투자 지형이 바뀌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반도체 팹 투자가 이뤄진 중국은 2년 뒤 하락세를 걷는 반면, 미국과 일본, 유럽, 동남아 등에는 투자가 최대 2배 넘게 늘어날 전망이다.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대규모 지원안을 내놓고 있는 데다 지정학적 반도체 허브 선점 경쟁이 맞물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가 잇따르고 있는 영향이다.

◇ 中 쏠림 현상 완화… 美, 반도체 공급망 새 중심지로

10일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팹 투자 규모는 지난해 470억달러(약 62조4200억원)에서 2026년 374억달러(약 49조6900억원)로 20%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 주요국 중 반도체 팹 투자가 줄어드는 곳은 중국이 유일하다.

그 사이 미국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새로운 중심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작년 미국엔 203억달러(약 26조9700억원)가 투자됐으나, 2026년까지 팹 투자액은 73% 늘어 중국과 비슷한 규모(353억달러·약 46조9000억원)로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손민균

지난해와 비교해 2026년 반도체 팹 투자 증가세가 가장 가파른 곳은 일본이다. 작년 64억달러(약 8조5000억원)에서 2년 뒤 132억달러(약 17조5400억원)로 급증할 추세다. 유럽·중동에 투입되는 팹 투자금도 86억달러(약 1조4300억원)에서 164억달러(약 21조8000억원)로 90%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도 글로벌 반도체 팹 투자가 크게 늘고 있다. 중국과 대만 사이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대안이라는 분석이다. 동남아에 투입된 투자 금액은 지난해 36억달러(약 4조7800억원)에서 2026년 64억달러(약 8조5000억원)로 77%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경우 같은 기간 팹 투자가 228억달러(약 30조2900억원)에서 324억달러(약 43조500억원)로 약 50%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대만도 이 기간 265억달러(약 35조2000억원)에서 316억달러(약 41조9800억원)로 투자가 약 19% 늘어날 전망이다.

클라크 청 SEMI 시니어 디렉터는 “올해까지만 해도 신규 가동되는 반도체 팹 35개 중 16개가 중국에 몰려있지만, 지정학적 요인과 각국 반도체법 등 공급망 변화 요인으로 향후 중국 투자가 줄어들 것”이라며 “2026년 글로벌 반도체 장비와 건설 지출 비용의 변화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전 세계 글로벌 반도체 팹 유치 경쟁 치열

인텔은 미국 뉴멕시코주 리오랜초에 첨단 3차원 패키징 기술인 '포베로스(Foveros)'를 활용하는 반도체 생산 시설 '팹9(Fab9)'을 오픈했다./인텔 제공

미국에서는 선단 공정 위주의 반도체 팹 투자가 잇따르고 있다. 2년 전 527억달러(약 70조4000억원)규모의 반도체법에 서명한 미 바이든 정부는 내달부터 대규모 보조금 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 수백억달러를 들여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TSMC, 인텔, 삼성전자 등이 보조금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미 정부의 보조금 계획이 구체화되면 향후 미국 내 신규 공장 투자는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고 있는 SK하이닉스도 첨단 패키징 공장을 미국 인디애나주에 지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역시 반도체 패권을 되찾기 위해 팹 유치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공장 건설 비용의 절반가량을 지원하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 정책에 힘입어 TSMC는 지난 6일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제1공장에 이어 제2공장을 더 큰 규모로 짓는다고 발표했다. 2027년 2㎚ 공정을 목표로 홋카이도에 첫 팹을 짓고 있는 일본 라피더스는 일본 정부로부터 1조엔(약 9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받는다.

삼성전자도 일본 정부에서 최대 200억엔(약 1800억원)의 보조금을 받아 패키징 개발 시설을 도쿄 인근에 건설할 예정이다. 대만 3위 파운드리업체 PSMC는 8000억엔(약 7조1400억원)을 투입해 미야기현에 공장을 지을 계획이며, 일본 정부는 최대 1400억엔(약 1조2500억원원)의 보조금 지급을 검토 중이다. 일본에 글로벌 반도체 공장 건설이 이어지면서 닛케이는 2031년 일본 반도체 자급률이 2022년의 8.4배인 44%로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자동차 생산 허브인 유럽에서도 반도체 팹 투자가 가속화되고 있다. EU는 2030년 말까지 민간과 공공에서 430억유로(약 59조5700억원)를 투입해 현재 10% 이내인 세계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린다는 내용의 반도체법을 지난해 통과시켰다. 이에 호응해 인텔은 균형 잡힌 공급망 확보를 목적으로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170억유로(약 24조원) 규모의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독일 공장엔 곧 양산될 18A(2나노미터·10억분의 1m 미만) 공정보다 진보한 1.5나노미터 정도의 공정 기술이 적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 정부는 인텔에 2027년까지 100억유로(14조3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한 규정 검토에 돌입했다. 이 밖에 TSMC를 비롯해 세계 3위 파운드리인 대만 글로벌파운드리, 미국 전력 반도체 제조업체 울프스피드, 독일 인피니언 등이 유럽에 새로운 팹 건설 계획을 내놨다.

세계 파운드리 3위 대만 글로벌파운드리가 싱가포르에 지난해 새로 지은 팹 전경./글로벌파운드리 제공

동남아에선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11%를 담당하고 있는 싱가포르에 투자가 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보조금 외에도 토지, 물, 전기 공급부터 고급 인력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글로벌파운드리는 지난해 40억달러(약 5조3000억원) 규모의 신규 팹을 세웠다. 세계 파운드리 4위 대만 UMC는 이곳에 50억달러(약 6조6500억원) 규모의 새 공장을 짓고 있다.

반도세 산업이 GDP(국내총생산)의 25%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도 글로벌 반도체 팹을 유치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 인텔은 최근 70억달러(약 9조3000억원)를 투입해 첨단 3D 칩 패키징 시설을 짓기로 했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도 31억달러(약 4조원)를 투자했다. 이 외에도 AMD, 브로드컴, 인피니언 등이 말레이시아 페낭에 반도체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