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000660)와 마이크론이 고대역폭메모리(HBM) 큰손 구매자인 엔비디아로부터 각각 수억달러에 달하는 선수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두 메모리 반도체 회사와 엔비디아의 차세대 HBM 제품(HBM3E) 공급 계약이 사실상 확정적이라는 의미다. 여기에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 삼성전자도 최근 엔비디아와 제품 적합성 테스트를 마치고 HBM 제품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졌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엔비디아로부터 첨단 메모리 제품 공급을 위해 각각 7000억~1조원 사이의 선수금을 수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수금의 성격 및 제품, 계약 내용에 관해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엔비디아가 내년에 출시할 그래픽처리장치(GPU) 제품과 짝을 이룰 HBM3E(5세대) 제품에 대한 물량 공급을 보장하는 성격으로 해석된다.
메모리 제조사에 고객이 대규모 선수금을 지급하는 일은 이례적이다. 이는 시장에서 HBM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수요 대비 공급이 극심히 부족한 가운데 엔비디아가 선제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HBM 물량을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다. 올해 내내 극심한 업황 악화로 수조원대의 손실을 기록하며 재무구조가 악화한 메모리 기업들 역시 HBM 설비투자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선수금과 같은 재무적 보조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를 비롯해 AMD,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이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위한 인프라 확보를 위해 메모리 반도체 기업에 HBM 공급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지만, 메모리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HBM 투자를 무작정 늘리는 것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 특히 최첨단 D램 여러 개를 쌓아서 만드는 HBM의 특성상 가장 핵심적인 실리콘관통전극(TSV) 공정의 비용 절감과 수율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다.
HBM이 지속적으로 차세대 제품으로 진화할 때마다 요구되는 공정 스텝과 필요한 생산설비가 달라진다는 것도 메모리 기업 입장에서는 리스크 요인 중 하나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HBM의 가장 큰 난관은 대규모 데이터 전송에 따른 급격한 발열 문제인데 3~4세대 제품까지는 어느 정도 발열을 컨트롤하고 있지만, 5세대 이후부터는 업체마다 해법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엔비디아의 대규모 선수금 지급은 HBM 생산능력 확대에 고심하던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 행보를 이끌어 냈다. 특히 최대 공급사인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서 받은 선수금을 HBM 생산능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TSV 설비 확충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지난 3분기 들어 TSV 라인 신설 관련 작업들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마찬가지로 마이크론의 TSV 설비 투자도 힘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삼성전자도 최근 엔비디아와 HBM3, HBM3E 제품 적합성 테스트를 마무리 짓고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차세대 제품인 HBM3E의 경우 SK하이닉스가 1b(10나노 5세대) D램으로 제품 테스트를 통과한 것과 달리 삼성전자는 1a나노(10나노 4세대) 제품으로 HBM3E를 생산하기 때문에 성능 향상을 위한 추가 공정 등 비용 증가 요소들이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