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정서희

콘서트 현장에 가본 사람이라면 아티스트가 멀리 보여 속상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준비해간 망원경이 무용지물일 땐 ‘가까이서 보고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 같은 ‘팬심’을 저격해 가상현실(VR) 콘텐츠를 만드는 스타트업이 있다. 이승준 대표가 이끄는 ‘어메이즈VR’이다.

어메이즈VR은 그래미 어워드를 3회 수상한 미국 래퍼 메건 디 스탤리언(Megan Thee Stallion)을 시작으로, 작년 7월 SM엔터테인먼트와 조인트벤처 ‘스튜디오 A’를 설립해 케이팝(K-pop) VR 콘서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에스파’의 VR 콘서트는 지난 3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흘간 진행된 세계 최대 음악 콘퍼런스 2023 SXSW에서 공개됐다.

VR 헤드셋을 쓰고 어메이즈VR이 제작한 에스파 콘서트를 켜면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공연 무대가 펼쳐진다. 멤버들의 움직임과 카메라 각도에 따라 가수가 채 10cm 거리도 안 되는 코 앞까지 다가오기도 한다. VR 콘서트 속 멤버들의 신체 비율과 외양은 실제 모습을 거의 그대로 구현했다. 피부의 작은 점이나 얼룩, 태닝 자국까지 생생하게 살렸다.

지난 20일 이 대표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어메이즈VR 한국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대표는 “내년 출시 예정인 애플의 VR기기 ‘비전 프로’는 현재 가장 최신형인 ‘메타 퀘스트2′보다 디스플레이 화소수가 약 3.3배 이상 많다”며 “어메이즈VR도 이에 발맞춰 콘텐츠 화질을 더 높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년에 제작할 콘텐츠들은 현실과 구분이 거의 안 될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메건 디 스탤리언./어메이즈VR

이 대표는 서울과학고,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및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컨설팅 회사인 커니, 베인앤컴퍼니를 거쳐 2012년 카카오에 합류했다. 카카오 직원 수가 약 100명에 불과했던 초창기 시절 전략팀장을 맡았다. 2014년 카카오-다음 합병, 카카오페이의 전신인 모바일 결제 플랫폼 사업부 출범 등 굵직한 업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2015년 이제범 카카오 전 공동대표와 함께 카카오를 나와 미국 실리콘밸리에 ‘어메이즈VR’을 세웠다. 이 전 대표는 현재 어메이즈VR 최고제품책임자(CPO) 및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남대련 최고기술책임자(CTO), 구경렬 개발 총괄도 창업 멤버다. 201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근처로 사무실을 확장한 뒤 2019년에는 해당 사무실로 미국 본사를 통합했고, 2020년에는 서울에도 사무실을 냈다.

이 대표는 “VR이 유망 산업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처음부터 VR 콘서트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VR기기 사용자가 볼 만한 콘텐츠가 없다는 점에 착안해 고민을 거듭하다 2019년쯤 VR 콘서트에 집중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약 1년 반 만에 메건 디 스탤리언과 협업해 만든 첫 VR 콘서트가 완성됐다.

그는 “메건 디 스탤리언과 작업했을 때만 해도 콘텐츠 제작에 5-6개월이 걸렸다”면서 “지금은 제작 과정을 모듈화한데다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해 6주면 완성된다”고 했다. 단순히 콘텐츠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제작에 필요한 가상현실 기술을 꾸준히 업드레이드해온 것이다. 대표적으로 하이퍼리얼 9K+ 실사 촬영 기술, 언리얼 엔진 기반의 VR VFX 파이프라인·모듈, AI 리라이팅(AI Relighting), AI 키잉(AI Keying), 분산 렌더링 시스템 등이다.

예컨대 그린 스크린에서 찍은 머리카락이나 의상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구분하는 작업에 AI를 활용, 제작 속도가 빨라졌다. 신체 음영을 자연스럽게 구현하려면 굴곡을 계산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AI를 활용한다. 이 대표는 “렌더링(2차원 화상에 광원·위치·색상 등 외부 정보를 고려해 사실감을 불어넣어 3차원 화상을 만드는 과정)도 업그레이드해 처리 속도가 220배 빨라졌다”고 했다.

그래픽=정서희

어메이즈VR은 다음달 VR 앱을 출시할 예정이다. 작업 속도가 빨라지면서 앱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업데이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메이즈VR 앱을 스토어에서 다운로드한 뒤, 앱 안에서 4-5곡 정도가 포함된 아티스트별 콘서트를 구입하는 형태가 될 전망이다. 이 대표는 “향후 구독 모델도 고려하고 있지만 일단 앱 론칭 초창기에는 콘서트 당 10달러 내외의 가격으로 판매하고자 한다”며 “메건 디 스탤리언과 에스파, 카이 등 1~2달에 아티스트 1명 씩 VR 콘서트를 순차적으로 업데이트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케이팝 팬들을 위해 올 하반기에는 국내에서 VR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앞서 미국에서는 글로벌 최대 영화관 체인으로 꼽히는 AMC에서 메건 디 스탤리언 VR 콘서트 투어를 진행했는데, 미국 15개 주요 도시에서 75%의 티켓 판매율을 기록했다.

어메이즈VR은 지난해 시리즈B 투자 유치를 마무리했다. 지금까지 누적 투자 규모는 5030만달러(약 650억원)다. 이 대표는 “애플이 비전 프로 출시 계획을 밝힌 이후 투자자들의 관심이 더욱 커져 하반기에 추가 투자 유치를 고려하고 있다”며 “2026년 나스닥 상장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어메이즈VR 제공

이 대표는 “스포티파이가 음악을 듣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오면서 전 세계 다수가 음악을 듣는 방식이 바뀌었던 것처럼 공연을 보는 방식의 혁신을 VR 콘서트를 통해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스포티파이는 전 세계 수백만명의 아티스트에게는 창작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수십억명의 팬에게는 이를 즐기고 영감을 얻을 계기를 제공하는 게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표가 말하는 어메이즈VR의 비전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들이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경험을 VR 콘서트를 통해 대중화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레미제라블 같은 소설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지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듯 VR기기가 보편화된다면 사람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방식도 다양해질 것”이라며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 감독 정도만 아티스트를 가까이서 보는 경험을 VR 콘서트를 통해 모두가 경험할 수 있게 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또 “아티스트들이 앨범을 냈을 때 홍보 차원에서 뮤직비디오를 출시하고 전 세계 투어를 도는데, 어메이즈VR도 시기를 맞춰 VR 콘서트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장기적인 목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