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 길병원이 지난 12일 의사 부족으로 소아청소년과 입원 병동 문을 닫았다. 의료계에선 길병원 사태를 시작으로 필수의료 체계의 붕괴가 시작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한병원협회가 마감한 2023년도 전반기 전공의 모집 결과에 따르면 전국 수련병원 67곳 중 '빅5'로 불리는 가톨릭중앙의료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중에서도 아산병원만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자 정원을 채운 상황이다.
영상 촬영을 통한 검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의사의 수는 턱없이 부족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할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홍은경 카카오브레인 부사장
카카오의 인공지능(AI) 전문 자회사인 카카오브레인이 내년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의 포문을 연다. 상반기 중 초거대 AI를 활용한 흉부 엑스레이 판독문 작성 서비스를 공개하고, 2024년 1분기 국내와 유럽에서 상용화 인허가를 받는 것이 목표다. 동시에 AI 신약 개발 플랫폼을 개발해 전 세계 주요 제약사에 도입하는 한편, 자체 파이프라인(신약 후보물질)을 만들어 지식재산권(IP)을 파는 계획도 추진한다.
전 세계 인구 고령화 현상으로 의료 분야 수요가 늘어나는 반면 의사 수는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사업 가능성을 발견했다. 실제로 미국의과대학협회(AAMC)는 오는 2034년까지 자국 내 의사가 최대 12만4000명 부족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업계는 카카오브레인이 마찬가지로 인력 부족을 경험하고 있는 수의 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할지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반려동물 진단 시장 규모는 2020년 45억달러(약 5조8298억원)에서 2026년 75억달러(약 9조7163억원)로 연평균 8.9%의 성장이 전망된다.
15일 정보기술(IT)업계에 따르면 카카오브레인은 현재 흉부 엑스레이 영상으로 판독문 초안을 만드는 AI 모델 'AI 캐드(CAD)'를 개발 중이다. 한국어를 사전적, 문맥적으로 이해하고 사용자의 의도에 맞춘 문장을 생성해 제공하는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 'KoGPT', 자연어를 이용한 이미지 인식 모델인 '얼라인' 등 보유하고 있는 기술력을 가장 일반적이지만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이 판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흉부 엑스레이 영상에 접목한다는 것이다.
AI 캐드는 이미 최소기능제품(MVP) 단계에서 자문단의 호평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의들은 영상을 바탕으로 병변의 위치나 크기를 파악하는 것보다 환자에 대한 소견과 진단을 내리는 판독문 초안 작성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 단계를 줄여 업무 효율과 정확도를 최대 2배까지 높였다는 것이다. 그간 국내외 AI 기업이 영상에 질환 의심 부위를 표시하는 데에 집중했다면, 카카오브레인은 의료진의 '진짜' 수요를 파악해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카오브레인은 내년 중 AI 캐드의 연구용 웹서비스를 공개하고, 상용화 모델 개발과 함께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등으로 적용 대상 범위를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이를 위해 지난 13일 9곳의 국내 대학병원과 공동 연구개발 계약도 맺었다. 협력하는 대학병원은 충남대병원, 충북대병원, 이화의료원(서울, 목동), 계명대 동산의료원, 순천향의료원(천안, 구미, 서울), 아주대병원이다. 이 대학병원들은 앞으로 2년간의 공동 연구 기간 카카오브레인에 임상 현장의 경험과 의학적 자문을 제공할 예정이다.
AI 캐드의 중심에는 약 7억4000만개 이미지-텍스트 쌍으로 이뤄진 데이터셋 '코요'가 있다. 데이터셋은 초거대 AI 모델이 정교한 결과값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핵심요소 중 하나다. 코요는 카카오브레인이 앞서 공개한 이미지 생성 모델 'RQ-트랜스포머'와 AI 아티스트 '칼로' 개발에 적용됐다.
코요는 카카오브레인이 준비 중인 신약 개발 플랫폼에도 쓰이고 있다. 카카오브레인은 화학 분자, 유전 데이터, 물리·화학 이론 등을 학습시킨 코요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생명 현상을 연구하거나 의약품 등을 설계하는 인실리코(In-Silico) 기법을 접합해 항체 신약 개발 플랫폼을 만든다는 구상이다. 항체 치료제는 인체가 세균, 바이러스 등 외부 물질에 감염된 후 이에 대항해 만들어 낸 항체 중 특정 병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을 선별해 만든 치료제다. 자가면역질환, 류머티즘, 암 등 질병 치료에 활용된다.
인실리코 기법은 카카오브레인이 지난해 12월 40억원을 투자한 데 이어 올해 7월 5년간 공동 연구개발(R&D) 계약을 맺은 국내 AI 신약 개발사 갤럭스가 맡는다. 갤럭스는 자체 보유한 인실리코 기법으로 국제 단백질 구조 예측 대회인 CASP, 국제 단백질 상호작용 예측 대회인 CAPRI 등에서 기술력을 입증한 바 있다.
AI를 활용한 신약 개발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이미 뛰어든 분야다. 2018년 '알파폴드'를 발표한 구글 딥마인드가 대표적인 선두주자다. 알파고의 신약 개발 버전이라고도 불리는 알파폴드는 지난 2020년 CASP에서 압도적인 우승을 거둔 바 있다. 코로나19의 유전정보가 공개된 직후 바이러스를 구성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단백질 구조를 안다는 것은 단백질을 기반으로 한 모든 물질대사를 이해한다는 뜻과 같다. 구글은 이 밖에도 제약사 사노피와 연구소를 설립해 당뇨병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카카오브레인은 '제2의 알파폴드'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지난 2021년 캐글 그랜드마스터이자 카이스트(KAIST) 생명화학공학과 출신인 이유한 박사를 신규 영입했다. 캐글은 구글 자회사로 900만명 이상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머신러닝(ML) 전문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연구자들이 이용하는 온라인 데이터 사이언스 커뮤니티 플랫폼을 운영한다. 카카오브레인은 이후 인실리코 활용 및 AI 개발 경력이 있는 연구원들을 이 박사 팀에 대거 합류시켰다.
김일두 카카오브레인 대표는 카카오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이프카카오 데브 2022′ 셋째 날이었던 지난 9일 기조연설에서 AI 캐드를 소개하며 "영상 판독을 위한 기존 AI 제품들이 자율주행에서 보조 장치의 역할을 했다면, 우리의 모델은 완전 자율주행을 가능케 하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신약 개발 플랫폼에 대해서는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수조원을 투자해도 성공률이 단 10%가 되지 않았던 신약 개발 과정을 1년 안에 수백억원 규모의 투자만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라며 "그러면서 기존보다 3배 이상의 성공률을 거두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카카오브레인이 추후 반려동물 진단 시장으로까지 발을 넓힐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수의계도 의료계와 동일하게 영상 판독문 작성, 신약 개발에 대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의 경우 지난달 AI로 반려동물의 엑스레이 사진을 분석해 근골격 질환과 흉부 질환이 의심되는 부위를 짚어주는 서비스 '엑스칼리버'를 출시하기도 했다. 다만 카카오브레인 측은 이런 가능성에 대해 "의료 현장에 정착한 뒤에는 여러 분야에 도입할 길이 열리겠지만 아직 인간 대상을 우선으로 기술 개발을 진행 중이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