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의 눈이 인공지능(AI) 반도체를 향하고 있다. 자사 스타트업 양성조직인 D2SF를 통해 AI 반도체 스타트업 퓨리오사AI에 투자해온 네이버는 최근 삼성전자와 손잡고 솔루션 개발에 돌입했고, SK텔레콤은 사내 AI 반도체 사업 부문을 떼어내 독립시킨 사피온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 진출에 나섰다. KT 또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제공하는 ‘풀 스택’ 사업자로의 도약을 목표로 AI 반도체 자체 제작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도 2030년까지 국내 데이터센터 시장의 국산 AI 반도체 점유율을 80%까지 늘린다는 목표로 기술 개발, 실증 사업 지원에 나서는 등 ‘판 깔아주기’에 나서면서 업계에선 “하드웨어의 혁신을 통한 AI 혁명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딥러닝의 창시자’로 알려진 제프리 힌튼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의 말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12일 발표한 '국산 인공지능(AI) 반도체를 활용한 K-클라우드 추진방안'. /과기정통부

1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전날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열린 ‘AI 반도체 최고위 전략대화’를 통해 ‘국산 AI 반도체를 활용한 K-클라우드 추진방안’을 발표했다. 이날 전략대화에는 이 장관을 비롯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메모리 반도체 대기업, 사피온·퓨리오사AI·리벨리온·딥엑스·텔레칩스 등 국내 AI 반도체 기업, NHN클라우드·KT클라우드·네이버클라우드 등 클라우드 기업이 참석했다.

K-클라우드 추진방안은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속·저전력 국산 AI 반도체를 개발, 이를 데이터센터에 적용해 국내 클라우드 경쟁력을 강화하는 게 목표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국산 AI 반도체 고도화 ▲AI 반도체용 소프트웨어(SW) 개발 ▲데이터센터 및 AI 서비스 실증 ▲산·학·연 협력 강화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국산 AI 반도체 고도화에는 8262억원, AI 반도체를 데이터센터에 적용하기 위한 SW 개발에는 1000억원을 각각 투입한다.

정부는 우선 현재 상용화 초기 단계에 있는 국산 NPU(신경망처리장치)의 국내 점유율을 2025년까지 23%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NPU는 딥러닝 등 AI 알고리즘에 최적화된 프로세서로, 국내에선 사피온·퓨리오사AI·리벨리온 등이 상용화에 성공했다. 정부는 이어 2028년까지 D램 기반 PIM(프로세싱인메모리)과 국산 NPU를 접합해 엔비디아 등 글로벌 업체가 기술 우위를 가진 해외 GPU(그래픽처리장치)급 성능을 저전력으로 구현한다는 목표다. 이후 2030년까지 비휘발성 메모리 반도체를 활용해 아날로그 MAC 연산 기반의 PIM을 개발, 극저전력화를 추진한다. 이를 통해 2028년 중국, 2030년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구상이다.

(왼쪽부터)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전략마케팅실장 부사장, 정석근 네이버 클로바 CIC 대표가 지난 6일 인공지능(AI) 반도체 솔루션 개발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네이버

여기서 핵심은 PIM이다. 이제까지 메모리 반도체가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을 맡고, 시스템 반도체인 CPU나 GPU가 연산 기능을 담당했다면 앞으로 등장할 PIM 반도체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처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데이터가 메모리와 프로세서를 오가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전력을 줄여 연산 성능 저하를 방지하는 PIM 반도체가 개발되면 대규모 데이터를 처리하거나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출력해야 하는 AI, 데이터센터, 고성능 컴퓨팅 등 분야에서 적극 활용될 것이란 게 업계 전망이다.

다만 이 같은 ‘포스트 폰 노이만’ 구조의 실현은 아직 요원하다. PIM 기술 개발이 극초기 단계에 있어서다. 세계 최초의 PIM 반도체를 삼성전자가 지난해 2월에 선보였다. SK하이닉스가 곧바로 PIM 반도체를 공개했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삼성전자가 네이버와의 협업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초거대 AI(인간의 뇌처럼 복잡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AI)를 이미 구축해 AI 반도체 개발에 필요한 소프트웨어적 역량을 갖춘 네이버와 힘을 합쳐 병목 현상을 해결하고 전력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PIM 반도체 개발에 착수한다는 복안이다. 양사는 이런 목표로 지난 6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실무 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삼성전자와의 협업은 AI 반도체 투자에 적극 나서온 네이버에도 기회다. 네이버는 지난 2019년 D2SF를 통해 퓨리오사AI에 80억원을 투자한 데 이어 지난해 다른 기관투자자들과 함께 800억원의 후속 투자를 단행했다. 정석근 네이버 클로바 CIC 대표는 “네이버가 (초거대 AI) 하이퍼클로바를 서비스하면서 확보한 지식과 노하우를 삼성전자의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과 결합하면 최신 AI 기술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전에 없던 솔루션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네이버는 이번 협업을 시작으로 기술 외연을 더욱 확장하며 국내 AI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구현모 KT 대표가 지난달 1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린 인공지능(AI) 전략 기자간담회에서 KT가 추진할 AI 서비스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네이버를 비롯한 국내 굵직한 ICT 기업들은 음성인식, 자율주행, 메타버스 등 AI 응용 산업이 더 커지기 전에 AI 반도체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SK텔레콤은 올해 초 미국 실리콘밸리와 경기 성남시 판교에 각각 사피온 본사와 사피온코리아를 설립했다. SK텔레콤은 사피온의 미국 및 한국법인을 오는 2027년까지 누적 매출 2조원, 기업가치 10조원 규모로 성장시킬 계획이다.

KT는 지난해 국내 AI 인프라 솔루션 기업 모레에 40억원을 투자한 데 이어 올해 7월 리벨리온에 300억원을 투자했다. 모레, 리벨리온과 함께 차세대 AI 반도체 설계와 검증, 대용량 언어모델 협업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엔비디아·그래프코어의 AI 반도체를 활용한 ‘GPU팜’도 이미 구축했다. KT는 향후 GPU팜에 리벨리온과 제작한 AI 반도체를 접목할 예정이다. KT와 리벨리온이 만든 AI 반도체는 내년 3월 공개된다.

가트너에 따르면 올해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27.8% 뛴 444억달러(약 58조752억원)에 달한다. 가트너는 이 시장 규모가 2026년 861억달러(약 112조6188억원)로 4년새 두 배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지현 코트라(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은 “전문가들은 AI 반도체 부문이 아직 초기 단계의 시장이므로, 메모리 반도체 중심의 한국 반도체 산업을 시스템 반도체로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며 “AI 반도체(하드웨어)와 AI가 적용된 플랫폼(소프트웨어)을 함께 개발해 AI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안의 중요성도 논의되고 있는 바,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진출을 노리는 우리 기업이라면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