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EU) 본부.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이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유럽 역시 반도체 자립을 외치며 설비투자에 돈을 풀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수출을 주력으로 한국 시장에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보이지만 향후 시장 성장성이 높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을 비롯해 자동차, 네트워크장비, 고성능컴퓨팅(HPC) 등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이 격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6일 미국 반도체전문지 세미콘엔지니어링이 집계한 2021년~2022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유럽 지역 반도체 투자액은 약 487억달러(한화 63조원)로 집계됐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이 최근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조성하기로 한 430억유로(한화 58조원)을 합치면 121조원을 넘는 대규모 투자가 단행되는 셈이다.

유럽 지역에 주로 투자되는 분야는 파운드리, 아날로그칩, 자동차용 반도체 등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인 인피니언, 유럽 최대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ST 등 유럽의 굵직한 반도체 기업뿐만 아니라 인텔, 글로벌파운드리(GF)도 유럽에 첨단 칩 제조 시설을 잇달아 건설할 예정이다. 이에 해당 설비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는 2024년~2025년경부터는 반도체 춘추전국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가별로 살펴보면 지난 2021년부터 올해까지 독일에 261억달러, 아일랜드 118억달러, 프랑스 57억달러, 이탈리아 51억달러의 설비 투자가 확정됐다. 인피니언은 독일 드레스덴 지역에 50억유로를 투자해 아날로그칩, 파워칩 등의 생산능력을 더 강화하기로 했다. 자동차용 반도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인텔도 독일, 아일랜드 등지에 290억유로를 들여 최첨단 칩 생산시설을 만들 예정이며 유럽 반도체업계 강자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이탈리아 카타니아에 7억3000만유로를 투자해 첨단 탄화규소(SiC) 기판 제조 시설을 만들 예정이다. 미국 글로벌파운드리(GF)도 독일 드레스덴 지역에 10억달러를 들여 장비 증설에 나설 전망이다.

이외에 구체적인 금액이 밝혀지지 않은 투자건도 다수다. 가령 세계 최대 네트워크 기업인 시스코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차세대 칩 디자인을 위한 연구소를 세우기로 했다. 네트워크용 반도체, 고성능컴퓨팅(HPC) 등에 대한 투자가 진행될 것으로 전망이다.

세미컨덕터엔지니어링이 집계한 국가별 반도체 투자를 비교해보면 유럽 지역에 쏟아지는 투자가 한국에 2년간 투입된 설비투자 비용의 4배 이상 벌어진 것으로 집계됐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팬데믹 기간 동안 반도체 쇼티지 문제가 전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았고 이후 반도체 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며 “각국은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돈을 계속 투자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유럽 최대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프랑스 빌딩. /로이터 연합뉴스

이같은 대규모 투자가 한국 반도체 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이목이 집중된다. 당장 표면적인 악영향은 없지만, 일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ST마이크로일레트로닉스, NXP, 인피니언 등과 경쟁하는 국내 팹리스(반도체설계전문기업)에 일부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럽, 일본 기업들의 입김이 더욱 세지는 만큼 반도체 생태계의 외산화가 더 공고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편 앞서 유럽연합은 반도체 생산확대를 위해 430억유로를 투자하는 EU 반도체 지원법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법안은 유럽 내 반도체 공급난 해결과 기술 자립을 위해 지난 2월 발의됐다. 민관 합동으로 430억유로의 기금을 조성하고, 최첨단 공정의 반도체 기술 역량 확보와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전방위적으로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EU는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생산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현재 10%에서 2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