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인텔이 글로벌 반도체 설계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팹리스) ARM의 인수에 참여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앞서 SK하이닉스와 퀄컴 역시 ARM 투자에 관심을 보였던 만큼 세계 반도체 선두 회사들이 모두 ARM에 군침을 흘리는 구도가 완성됐다. 다만 올해 초 엔비디아의 ARM 인수 시도가 각국 반독점규제에 의해 무산됐고, 이후 투자금을 회수하고 싶은 최대주주 일본 소프트뱅크가 ARM의 기업공개(IPO)를 추진 중에 있다. 이 때문에 반도체 기업들은 반독점 규제를 피하기 위해 ARM에 대한 공동 투자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9일 정보기술(IT) 매체 CRN 등 미국 언론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인텔이 ARM 인수에 공동으로 나설 가능성이 제기됐다. 특히 CRN의 경우 시장조사업체 관계자를 인용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만남에서 ARM 투자와 관련한 얘기를 나눴을 것으로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의 유럽 출장이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 ASML과의 장비 공급 협업과 함께 ARM 등 반도체 기업 인수를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ARM은 영국에 본사를 둔 팹리스로, 반도체 생산의 가장 핵심적인 설계자산(IP)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모바일 칩 70% 이상이 ARM의 IP를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다. 이 뿐만 아니라 서버용 프로세서, 자동차, 카메라 등 반도체가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의 기업들이 ARM의 설계IP를 활용하고 있다. 지난 2019년 엔비디아가 ARM을 400억달러(약 50조원)에 인수합병(M&A)하려 했을 때, ‘세기의 빅딜’이라는 얘기가 나온 건 이 때문이다. 엔비디아 인수 발표가 나온 직후 ARM의 기업가치는 더욱 올라 한때 800억달러(약 100조원)에 육박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엔비디아는 반독점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주요 기업의 M&A는 반드시 이해당사국의 반독점 심사를 받아야 기업 결합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등 각국 규제 당국은 반도체 설계IP의 지배적 지위를 갖고 있는 ARM이 특정 회사(엔비디아)에 인수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엔비디아는 ARM 인수를 올해 초 포기했다.
ARM의 최대 주주인 일본 소프트뱅크는 매각 불발로 내년 3월 말까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ARM을 상장한다는 방침을 새로 세웠다. 2016년 ARM 인수 당시 투자한 320억달러(약 32조원)를 회수하기 위해서다. 다만 반도체 대기업들이 IPO 추진에도 ARM 인수 의향을 여러 차례 밝힌 만큼 또 다른 ‘세기의 빅딜’이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 단, 엔비디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공동 투자의 형식이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여러 국적의 회사가 함께할 수 있다면 반독점 규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3월 30일 경기 이천시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ARM 인수합병을 위해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라며 “ARM은 특정한 누군가(기업)가 그 이익을 다 누린다면 인수하도록 생태계에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지분을 공동으로 인수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 또한 “ARM은 매우 중요한 자산이고, 반도체 산업 발전에 필수적이다”라며 “퀄컴 또한 투자에 관심 있는 당사자로, ARM 인수를 위해 다른 칩 제조사와 협력할 수도 있다”고 했다.
업계는 삼성전자와 인텔, SK하이닉스와 퀄컴 등 반도체 대기업들이 ARM을 인수하려는 요인은 충분하다고 본다. 특히 삼성전자나 퀄컴의 경우 이미 ARM 설계를 가지고 칩을 생산하고 있다. 애플 또한 자체 개발 모바일 칩에 ARM의 설계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ARM 인수로 IP를 확보하게 된다면 경쟁 우위에 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인텔은 모바일 칩 분야에서 ARM에 밀려 신규 개발 계획을 철회했지만, 노트북 칩 분야는 계속해서 영향력을 보유하고 싶어 한다. 최근 노트북 칩과 모바일 칩은 시장 경계가 허물어지는 중인데, 노트북 휴대성이 강조되면서 발열과 전력소모가 낮은 모바일 칩 적용이 늘어나고 있다. 기존 x86 아키텍처(설계구조) 기반 노트북 칩을 만드는 인텔이 ARM 인수를 통해 새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SK하이닉스의 경우 메모리반도체가 회사 매출의 80% 이상을 책임지고 있지만, 최근 시스템반도체 분야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ARM 공동 인수는 SK하이닉스의 미래 사업에 있어 부족한 역량을 채워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 반도체 80~90%가 ARM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공동 투자 형식으로 ARM에 지분 투자를 하면 ARM 자산을 사용하는 데 보다 안정적이고 비용에서도 유리한 측면이 만들어 진다”라며 “다수의 반도체 회사가 ARM 인수에 공동으로 참여할 경우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반대했던 경쟁 업체나 각국 규제당국에 대한 위험요소도 줄어들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