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SK하이닉스 제공

SK하이닉스가 인수합병(M&A)과 투자로 삼성전자·인텔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반도체제국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문(현 솔리다임)에 이어 8인치(200㎜) 파운드리 기업 키파운드리 인수로 메모리와 비메모리 반도체 역량을 동시에 높이고 있다. 여기에 전 세계 모바일 칩 95%의 설계도를 제공하는 영국 ARM의 공동 인수를 추진한다.

5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ARM은 영국 최대 반도체 설계기업(팹리스)으로 대만 미디어텍, 미국 퀄컴, 애플, 삼성전자 등이 만드는 모바일 칩의 기반인 설계도를 제공한다. 전 세계 모바일 기기 95% 이상이 ARM 설계도로 제작된 칩을 채택할 정도로 시장 위상은 절대적이다. 삼성전자 갤럭시를 쓰던, 애플 아이폰을 쓰던 칩 설계도는 모두 ARM의 것을 썼을 가능성이 100%에 가깝다는 얘기다.

지난 2월 미국 엔비디아의 ARM 인수 추진이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 등 각국 경쟁당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인텔이나 삼성전자, AMD, 퀄컴 등도 엔비디아 독과점을 우려해 이번 인수에 반대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이 ARM을 인수하기 위해 컨소시엄을 구성하기로 했다. 복수 국가의 기업이 인수에 나설 경우 독과점 우려가 줄기 때문이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달 정기 주주총회에서 “ARM M&A를 위해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ARM 제공

SK하이닉스는 ARM 인수로 5세대 이동통신(5G) 기반 모바일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 또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서버용 칩 시장에서도 존재감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ARM은 2025년 전 세계 클라우드 서버 칩 설계의 25%를 맡을 전망이다.

ARM 인수는 단순히 칩 설계 회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ARM의 특화된 반도체 설계는 논리적 연산을 담당하는 로직 반도체다. 로직 반도체는 연산을 위해 반드시 메모리 반도체가 필요하다.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시장도 함께 따라간다는 것이다. 기업 M&A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 받는 박 부회장의 노림수가 여기에 있다. SK스퀘어 대표이사이기도 한 박 부회장은 SK스퀘어 주주총회에서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으로 인한 출장 제한이 완화되면 (ARM 인수를 위해) 4월부터라도 실리콘밸리 등에서 협의를 이어갈 것이다”라고 했다.

M&A 자금 동원 면에서도 단독보다는 공동 인수가 유리하다. 현재 SK하이닉스가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10조원 수준으로, 이는 엔비디아가 책정한 ARM 인수대금 48조원과 비교해 5분의 1에 불과하다. 업계 관계자는 “ARM 인수에 따른 독과점 우려, 자금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했다.

박정호 SK스퀘어・SK하이닉스 대표이사. /SK스퀘어 제공

공동 인수의 한 축으로는 인텔이 거론된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 또한 지난달 ARM 인수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또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 과정에서 두 회사가 쌓은 신뢰 관계를 고려하면 SK하이닉스와 인텔이 함께 ARM을 인수하는 구도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 비메모리 사업 분야에서 공격적인 투자와 M&A를 펼치고 있다. 8인치 파운드리인 키파운드리 인수도 그 일환이다. 지난해 10월 SK하이닉스는 사모펀드(PEF) 알케미스트캐피털 등이 보유한 키파운드리 지분 100%를 5758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지난달 30일 국내 경쟁당국인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기업결합 승인을 받았다.

아직 중국 심사가 남았지만, 8인치 파운드리는 12인치(300㎜) 파운드리와 달리 첨단 공정이 아니다. 또 키파운드리의 시장 순위가 낮다는 점에서 큰 걸림돌은 없을 전망이다. 현재 SK하이닉스시스템IC라는 8인치 파운드리를 운영 중인 SK하이닉스는 키파운드리를 인수하더라도 합산 점유율이 1% 내외다. 독과점 우려는 나오지 않는다.

SK하이닉스 직원이 128GB DDR4 제품 생산 공정을 확인하는 모습. /SK하이닉스

최근 8인치 파운드리로 생산하는 자동차 반도체나 디스플레이구동칩(DDI) 등 반도체 공급난이 가중되고 있어 시장 전망이 밝다. 키파운드리 인수로 SK하이닉스의 파운드리 생산 능력은 단숨에 약 2배 커진다. 또 SK하이닉스시스템IC의 중국 이전으로 공백이 불가피한 국내 생산 기반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로 세계 4위권이었던 해당 시장 순위가 2위까지 올라갈 전망이다. 지난해 말 1단계 인수 대금을 주고, 인텔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사업과 중국 다롄 공장을 넘겨 받았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현지 자회사 솔리다임을 설립, 낸드플래시에 기반한 SSD 사업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각자대표였던 이석희 SK하이닉스 전 사장이 솔리다임의 의장을 맡아 미국 사업을 진두지휘한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매출의 95%를 메모리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다”라며 “비메모리 반도체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공격적인 투자와 M&A를 통해 삼성전자나 인텔에 버금가는 반도체제국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