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키우기 위해 설비투자(CAPAX)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장비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물류 대란과 일부 원자재 부족 문제가 겹친 탓이다. 파운드리 시장은 올해 처음으로 시장 규모가 1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는데, 파운드리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장비 수급 문제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11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파운드리 상위 10개 업체의 매출 총액은 전년보다 21.3% 늘어난 약 1038억달러(약 122조8000억원)로 전망됐다. 상위 10개 업체의 매출 총액은 지난 2019년 690억달러에서 지난해 856억달러로 24% 성장한 이후, 올해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에도 10개 업체의 매출 총액은 13.3% 늘어나 1176억9000만달러(약 137조6600억원)에 달할 것으로 트렌드포스는 전망했다.
시장 호황으로 파운드리업계도 설비투자를 통해 매출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미세공정 주도권을 쥐기 위해 평택 P2 라인 5㎚(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에 투자해 최근 가동에 들어갔으며, P3 인프라 투자도 진행했다. P3 라인에서는 내년 상반기 3㎚ 생산시설이 순차적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삼성전자 측은 "평택 파운드리의 극자외선(EUV) 첨단 공정 증설 투자 등을 중심으로 시설투자를 집행했다"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곧 4~6팹(공장) 투자도 시작한다.
파운드리업계 1위 TSMC는 미국 애리조나와 일본 쿠마모토 등에 새 팹을 짓는다.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 역시 최대 110조원의 유럽 파운드리 팹 조성 계획을 갖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이런 업계의 설비투자 금액이 내년 약 6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이는 올해 500억달러 수준이었던 것에서 약 15% 늘어난 것이다.
다만 현재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 늘어난 수요로 장비 공급을 제때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국발(發) 물류대란과 공급망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반도체 장비 시장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장비 세계 3위 램리서치 더그 베팅거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회사 반도체 리드타임(주문부터 납품까지의 기간)이 지연된 상황을 인정한다"라며 "반도체 시설투자가 예상보다 많아지면서 전례 없는 반도체 장비 수요로 이어졌다"고 했다.
반도체 장비 업계는 최근 장비 리드타임이 품목에 따라 최대 2년이 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금 주문하면 2024년에나 장비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의 경우 삼성전자와 TSMC, SK하이닉스, 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이 모두 장비를 달라며 아우성치는 상황이다.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연간 장비 생산능력을 늘리는 작업 중 일부 원자재 부품 부족 현상을 겪어 신규 제품 생산 착수가 늦어졌다"고 했다.
장비 공급 적체 문제는 결론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 투자에 속도를 내는 국내 기업에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램리서치, 네덜란드 ASML, 일본 도쿄일렉트론 등 4개 업체가 반도체 장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치열해지는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국내 기업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업계 시각이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국내 투자뿐 아니라, 미국 신규 파운드리 팹 투자를 확정할 예정으로 장비 납품이 늦어지면 1위 TSMC와 치열하게 전개 중인 미세공정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세공정이 적용된 첨단 시스템 반도체를 주문하는 고객사 입장에서는 빠르고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이 가능한 파운드리와 계약할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 역시 키파운드리 인수를 시작으로 8인치(200㎜) 파운드리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는데, 장비 수급에 문제가 생길 경우 초기 사업 확장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애초 키파운드리 역시 8인치 웨이퍼 반도체 장비를 구하기 어려워 기존 업체를 인수하는 쪽으로 투자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노종원 SK하이닉스 경영지원 담당은 "설비투자와 관련해 고민이 많은데, 최근에 장비 리드타임이 굉장히 길어지고 있다"라며 "경영계획을 예전보다 최소 두 달 이상 앞당겨 내년 계획을 준비하고 있고, 장비 발부와 장비 업체와의 소통도 예년보다 빠른 시기에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