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대만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플립칩(FC)-볼그리드어레이(BGA) 반도체 기판 시장에서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이 1조원대 투자에 나서면서 빠르게 추격을 도모하고 있다. 국내 기업의 경우 투자 시기가 일본·대만에 비해 다소 늦은 데다 규모 역시 그리 크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시장 성장세를 고려하면 충분히 틈새를 좁힐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4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반도체를 장착하는 인쇄회로기판(PCB)은 반도체 후공정인 패키징 작업에 있어 핵심 중 하나다. 기판은 넓은 절연판 위에 회로를 형성하고, 그 위에 장착한 반도체 등의 부품을 전기적으로 연결, 인체의 신경망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현재 모든 전자기기에는 이런 기판이 필요하다.

반도체를 얹는 PCB는 모바일용 반도체에서 활용되는 FC-칩스케일패키징(FC-CSP)과 PC용 반도체에서 주로 쓰이는 FC-BGA로 구분한다. FC-CSP는 작은 모바일 기기에 들어가는 만큼 칩과 기판의 크기가 거의 비슷하지만, 중앙처리장치(CPU)·그래픽처리장치(GPU)처럼 전기 신호 교환이 많은 반도체를 장착하는 FC-BGA의 경우 칩보다 기판의 크기를 크게 만든다.

최근 전기차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시장의 고성능 칩 수요가 크게 늘었고, 여기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처리해야 할 정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반도체와 FC-BGA 수요 역시 폭증했다. 현재 인텔, AMD, 엔비디아 등 대형 팹리스(반도체 설계기업)들이 FC-BGA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AMD 서버용 CPU 에픽(EPYC). /AMD 제공

시장조사업체 프리스마크는 지난해 PCB 시장 규모를 전년 대비 4.4% 늘어난 640억달러(약 72조원)쯤으로 집계했다. 이 가운데 반도체 패키징 시장은 15%인 100억달러(약 11조9300억원)로, 전년 대비 23.2% 성장했다. 업계는 반도체 패키지 기판 시장이 올해 19% 더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오는 2025년까지 연평균 10%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FC-BGA는 이런 시장의 47%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김지산 키움증권 연구원은 “FC-BGA는 서버 중앙처리장치(CPU) 등 프로세서 대형화에 따른 대면적화, 차세대 패키지 기술의 진화 및 제조 난이도 증가, 제한된 경쟁 구도 등 구조적 호황이 이어지고 있다”라며 “2019년 이후 대규모 증설에도 공급 부족이 지속될 것이다”라고 했다.

FC-BGA 시장은 일본 이비덴과 신코덴키가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프리마스크에 따르면 FC-BGA PCB 생산능력은 이비덴이 월 8만㎡를, 신코덴키가 5만㎡를 보유하고 있다. 대만 유니마이크론, 난야, 오스트리아 AT&S 등도 높은 생산능력을 갖고 있는데, 각각 3만109㎡, 2만9500㎡, 2만4000㎡ 등이다. 국내 업체로는 삼성전기만이 월 1만6900㎡의 생산능력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과 대만 기업은 서버용 CPU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텔 등과 물량 보전 계약을 맺으며 이미 조 단위 투자액을 FC-BGA에 쏟고 있다. 특히 이비덴과 신코덴키의 경우 이미 시장 장악을 한 상태에서의 추가 투자로 다른 경쟁 업체와의 틈새를 더 벌리고 있다.

삼성전기 반도체 기판 트렌드 홍보영상. /삼성전기 제공

서버와 데이터센터의 증가로 FC-BGA 수요는 더 확대될 것으로 보여 투자가 늦어질수록 시장 진입은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 때문에 국내 기업의 발걸음 역시 빨라지고 있다. 우선 삼성전기는 1조원 이상을 FC-BGA에 투자하기로 했다. 해외 고객사 물량을 전담하는 전용 생산 라인도 구축한다. 삼성전기의 경우 PC용 FC-BGA에 집중했는데, 앞으로는 서버용으로도 고객사를 넓히기로 했다.

LG이노텍 역시 장기적인 관점에서 향후 수년 간 1조원 내외의 투자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노텍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에 주로 사용되는 FC-CSP만 생산 중인데, 미래먹거리 중 하나로 FC-BGA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LG이노텍은 시스템인패키지(SiP)와 안테나인패키지(AiP) 등에서 업계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여기에 FC-BGA의 추가로 기판 전체의 실적을 끌어 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최근 열린 관련 콘퍼런스에서 관련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그래픽=정다운

박강호 대신증권 연구원은 “(LG이노텍은) 지난해 수익성이 낮은 주기판(HDI)과 연성 PCB 사업을 중단하고, 반도체 PCB 중심으로 도약을 진행 중이다”라며 “PC CPU, 자동차 분야에서 FC-BGA 수요 전망과 포트폴리오 다변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대덕전자 역시 FC-BGA 투자를 늘리고 있으며, 지난 8월 900억원을 선투자한 생산라인에서 양산 제품을 출하했다. 앞으로 700억원을 추가 투자한다. 신영환 대덕전자 대표는 “수율과 품질로 고객 신뢰에 보답하고, 기술력을 기반으로 성장을 가속해 2024년까지 신규 제품(FC-BGA)에서 연 매출 3000억원을 달성할 것이다”라고 했다. 대덕전자는 앞으로 4000억원을 투자해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AI 칩 등 시스템 반도체용 FC-BGA 생산능력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